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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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녀 데레사의 가르침에 따른 영성생활] 18. 예수님과의 만남을 향한 데레사의 여정 ⑧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맡기는 ‘영적 어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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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데레사 성녀는 연약한 ‘아기’로 오신 예수님을 감탄의 눈길로 관상하곤 했다. 사진은 미국 워싱턴 원죄없이 잉태되신 성모 순례지 성당의 아기 예수와 성모 그림. 【CNS】

 아기 예수님에 대한 성녀 데레사의 신심

우리는 성녀 데레사가 예수님과 맺은 관계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성녀가 구체적으로 예수님의 어떤 모습에 매료됐는지 살펴보고 있습니다. 이번에는 성녀가 예수님의 유년 시절을 어떻게 바라보았고 자신의 영성에 어떻게 통합시켰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성녀 데레사의 영성에서 ‘아기 예수님’께 대한 신심은 특히 성녀가 지은 여러 편의 시(詩)에 잘 드러나 있습니다. “성부여, 당신 독생 성자를 저희에게 주소서. 그분이 오늘 세상에, 가난한 이 농장에 오셨다네.” (시 11번)

성녀는 이런 아기 예수님을 감탄의 눈길로 관상하곤 했습니다. 그 이유는 영원하신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셨으며 그것도 완전히 무방비 상태에 있는 아주 작은 아기가 되어 이 세상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온 우주의 주인이신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우리 손에 당신 목숨을 내어 맡기신 것입니다. 이 엄청난 신비와 역설 앞에서 성녀는 입을 다물지 못했습니다. 아기가 되어 오신 하느님의 생명이 우리 손에 달려 있게 된 형국이었습니다. 실제로 자신의 왕좌에 대해 위협을 느낀 헤로데 왕은 어떻게든 그분을 찾아 죽이려 들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성모님 태중에 있을 당시, 요셉 성인의 오해로 성모님과 파혼에 이르렀다면, 태중의 예수님은 성모님과 함께 사람들이 던진 돌에 맞아 처참히 돌아가고 마셨을 겁니다. 천상의 가장 높으신 분께서 허무에 불과한 우리들의 육신을 취하시고 우리 손에 당신 목숨을 맡기실 정도로 우리를 신뢰하시고 사랑하셨던 겁니다.



수난을 향한 여정의 출발점인 아기 예수님

그런데 성녀 데레사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들어오신 순간부터 타락한 인간의 구원을 향해 계셨다는 점에 대해 주목했습니다. 그래서 시를 통해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그분이 나면서부터 사람들은 그분을 괴롭히지 않았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분은 악을 없애며 죽어 가셨습니다. …당신은 이렇듯 아무 죄도 없으신 아기를 보셨나요?” (시 13번)

성녀에 따르면, 예수님의 유아 시절은 그 자체로 독립된 신비가 아니라 ‘수난’을 향해 있는 신비입니다. 이는 성녀가 아기 예수님을 구원 역사의 핵심인 그분의 수난과 긴밀하게 연결 지어 묵상하려 했기 때문입니다. 성녀는 성탄 찬미가 형식으로 만들어진 이 시에서 완전히 무방비 상태 속에 있는 아기 예수님을 통해 인류를 위해 천상 옥좌를 내던지고 이 땅에 내려오신 하느님의 사랑을 보았으며 동시에 언젠가 이루어질 수난이 시작되고 있음을 보았습니다. 성녀에게 아기 예수님 모습은 ‘십자가’라는 하느님의 자기 계시를 드러내는 출발점인 셈입니다.



영적 어린이 영성의 선구자

사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아기 예수님에 대한 신학이나 영성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습니다. 현대로 들어와 아기 예수님에 대한 관심이 커진 것은 성녀 데레사와 동명이인(同名異人)이자 성녀 데레사의 영적 딸이라 할 수 있는 프랑스의 아기 예수의 성녀 데레사를 통해서였습니다. 소화 데레사는 완덕을 향한 영적 여정에서 자신의 힘이 아니라, 마치 어린아이가 엄마를 온전히 신뢰하며 그 품에 안겨 엄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가듯, 그렇게 하느님의 인도에 온전히 자신을 내어 맡기는 ‘신뢰’와 ‘의탁’을 통해 완덕의 산 정상으로 인도하는 지름길에 이를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러한 그분의 영성을 소위 ‘영적 어린이의 길’이라고 하는데, 아기 예수의 데레사는 아기 예수님에 대한 깊은 신심에서부터 이 길에 대한 영감을 받았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성녀 소화 데레사보다 훨씬 이전에 먼저 ‘영적 어린이의 길’을 걸었고 가르친 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가 말하는 영성생활의 중반을 지나게 되면 인간이 주도권을 쥐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느님의 은총과 섭리에 자신을 내어 맡겨야 합니다.

영성생활에 진보할수록 인간이 가져야 하는 이 태도를 전문 용어로는 ‘신적 수동성(神的 受動性)’이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장애인용 의자에 앉아 있는 환자는 자기 힘만으로 돌아다닐 수 없습니다. 그것은 환자 곁에 있는 다른 누군가가 그 환자의 의자를 밀어줄 때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그럴 경우 환자가 할 수 있는 것은 외부의 어떤 큰 힘에 의해 자신이 인도되도록 동의하고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이는 하느님의 은총 작용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태도입니다. 즉, 하느님의 은총에 대해 인간이 할 수 있는 최선은 하느님께서 맘껏 사랑하실 수 있도록 그분의 손에 ‘자신을 내어 맡기는 일’입니다. 이렇듯 하느님의 적극적인 사랑에 대해 인간은 ‘수동적’인 모습으로 드러납니다. 이는 하느님께서 온전히 주도권을 쥐고 당신의 성화(聖化) 계획을 이루실 수 있도록 그분께 자기 자유를 내어드리는 유순한 태도를 말합니다. 그렇게 될 때 하느님께서는 비로소 우리를 위한 당신의 일을 하실 수 있습니다.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는 영성생활의 전체 여정을 인간 영혼의 내면 중심에 현존해 계신 하느님을 향한 여정에 비유하면서 이를 7개의 궁방으로 나눴습니다. 이 여정에서 4궁방부터는 하느님의 은총을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다고 해서 ‘신비적인 단계’라고 하는데 이 단계부터는 하느님이 주도권을 쥐고 인간을 인도합니다. 따라서 4궁방부터는 인간이 온전히 자신에 죽고 하느님께 자신의 주도권을 내어드려야만, 다시 말해 아기 예수의 데레사가 말하는 ‘어린이와 같은 마음’, ‘의탁’, ‘신뢰’가 있어야만 입성(入城)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일상의 삶에서 얼마나 하느님께 삶의 주도권을 내어드리며 살고 있습니까? 혹시 자기 생각과 계획으로 꽉 차 있어 그분께서 건네시는 손길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은지 반성해 볼 일입니다. 여러분 각자를 향한 그분의 계획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여러분 자신을 그분의 손길에 온전히 내어 맡기는 ‘영적 어린이’가 되시길 바랍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4-06-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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