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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따라 떠나는 신앙여행] 30-칠극(七克)이야기 (5)

하느님 사랑에 젖어들면 질투는 사라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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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기섭 신부(가톨릭대 신학대 학장, 동양철학)


둘째 주제: 질투를 가라앉히다


처음 칠죄종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을 때, 질투가 과연 여기에 포함돼야 할 만큼 커다란 악덕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누구나 조금씩은 지니고 살지만 그렇게 해롭게 느껴지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판토하의 글을 읽으면 그것이 다른 덕에 비해 깊은 악의 뿌리이며 어리석은 악덕인지를 깨닫게 된다. 그것의 대가로 주어지는 쾌락도 없으면서, 실제로 남에게 받는 피해도 없으면서 혼자 일으키고 혼자 고통을 받는 모습이란….
 무엇 때문일까? 질투의 원인은 많겠지만, 아마 가장 일반적인 것은 끊임없이 남과 비교하고 경쟁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論語」에서는 처음부터 `君子`를 `남이 알아주지 않아도 노여워하지 않는`(人不知而不?) 사람이라고 규정한다.
 즉 세상의 가치나 남들의 평가에서 자유로운 경지를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하면 오랜 수련을 통해 올바르고 확고한 신념을 지니고, 자기만의 세계를 지니고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이다.
 이들도 남의 잘잘못을 보고 그것들과 부딪히며 살아간다. 그러나 그것을 자신과 연결시키며 휘둘리지 않고 오히려 자신을 수양할 수 있는 기회로 삼는다. 그래서 공자는 이렇게 일러주곤 했다. "어진 사람을 보면 그와 같아질 것을 생각하고, 어질지 못한 사람을 보면 속으로 자신을 반성해 보아야 한다."(見賢思齊焉 見不賢而內自省也. 「論語」, `里仁`)
 뿐만 아니다. 또 말하기를 "착한 것을 보면 거기에 미치지 못할 듯이 여기고, 착하지 않은 것을 보면 끓는 물이 뜨거워서 손을 빼는 듯이"(見善如不及 見不善如探湯, 「論語」, `季氏`) 하라는 것이다.
 
 판토하는 글머리에서 "질투는 마치 파도처럼 일어나는데, 이는 용서로서 가라앉혀야 한다"(妬如濤起 以恕平之)고 말한다. 이 서(恕)는 유교 대인윤리의 핵심적 개념이다.
 고대의 많은 종교가 그러하듯, 유학에서도 남을 사랑하는 기준은 바로 자기 자신이 된다. 그래서 주자는 恕를 `자신을 미루어 다른 사물에 미치는 것`(推己及物)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더 나아가 공자의 인(仁) 사상을 설명하는 데에도 가장 중요한 개념이 된다.
 언젠가 자공이 공자에게 물었다. "한 마디 말로 평생 동안 실천할 만한 것이 있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바로 恕이다. 내가 하고자 하지 않는 것을 남에게 베풀지 않는 것이다."(己所不欲 勿施於人, 「論語」,`衛靈公`)
 공자는 `顔淵篇`에서 仁을 설명하면서도 같은 말을 한다. 또한 그것을 적극적인 개념으로 확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내가 서고자 하면 남도 서도록 해 주고, 내가 이루고자하면 남도 이루게 해 주어야한다."(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論語」, `雍也`) 마치 레위기에서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레위 19,18)고 가르치는 것과 같다.
 그러나 판토하가 강조하는 것은 역시 하느님 사랑이다. 하느님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살아가는 자만이 질투를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느님 사랑은 정직하고, 먼저 우리에게 주시며, 바라는 것이 없고, 맑으며, 헛된 말로써가 아니라 실제로 베풀어주시는 사랑이다. 이것이 빤또하가 늘 말하는 근본을 아는 것(知本)이고, 모든 덕행의 열쇠가 되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를 질투하는가? 왜 질투하는가?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그 안에 잠겨보자. 그것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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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0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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