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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문학의 징검다리] 8 - 하느님 그늘 아래로

박광호(모세, 시인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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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하느님 자녀로 태어났음에도 한동안 크게 변화하지 못했다. 주일미사 참여로 본분을 다했다고 여겼으며, 돌아가신 어머니와 나 자신을 위한 기도가 전부이다시피 했다. 그러한즉 내 영혼이 성장할 리 만무했다. 영세하고 2년째 돼서, 병이 재발되어 암담해 있을 때 죄를 짓고 냉담한 것도 미약한 신심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미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포로였다.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려고 했으나 당신은 놓아주지 않으셨다. 비록 나 보잘것없음에도 하느님에게는 소중함을, 더욱이 고통받는 나를 더욱 사랑해 주심을, 막셀라 수녀님과 전교회장이 일깨워주었다. 이분들의 지도로 다시금 신앙의 옷을 입었다.
 나의 변화는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인생에 대한 회의 그리고 원망이나 미움을 털어버리고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가족들에 대한 고마움을 가졌다. 내가 어떤 상황에서도 긍정적이고 적극적인 사고를 갖게 된 것은 하느님께서 함께 하신다는 믿음의 소산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1966년은 내가 두 가지 은혜를 받은 해였다. 첫 번째 은혜는 1월에 창립한 `흑조시인회` 창립회원이 된 것이다. 이 시인회는 목포와 신안군 출신 젊은 시인 6명이 주축이 됐고, 거기에 나도 포함됐다. 우리는 자주 회동하여 합평회를 가졌다.
 같은 해 12월에는 창간호 「흑조」를 발간했다. 유치환 시인 축사가 동인지를 빛내주었다. 그 후 서정주ㆍ박목월ㆍ박남수ㆍ신석정ㆍ조병화 시인 등 쟁쟁한 분들의 축사로 매년 일 회씩 동인지가 나왔고, 이것은 이십 년 넘게 계속됐다.
 나는 이 시인회의 창립회원임을 늘 고맙게 생각했다. 동아리 속에서 나의 시를 평가하고 분발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약 시인회에 가입하지 않았더라면, 우물 안 개구리처럼 자기 시에 도취되어 더 발전할 수 없었을 것이다.
 두 번째 은혜는 그보다 훨씬 큰 것이었다. 내 신앙에 활력소가 되고, 장차 치유의 선물을 받게 해준 레지오 마리애에 입단한 것이다. 그에 앞서 내 영적 은인인 막셀라 수녀님과 김병준 신부님은 임기를 마치고 경동본당을 떠났다.
 그 해 6월 5일 주일미사에 참례하고 마당에 나왔을 때, 부임한 지 오래지 않은 천노엘 주임신부님이 다가왔다. 성 골롬반외방선교회 소속의 천 신부님은 나한테 다정하게 권고했다. "박 모세 형제님, 우리 본당에 좋은 단체가 있는데 한 번 참석하지 않겠습니까?"
 나는 귀가 솔깃했다. 영세 이후 그때까지 본당 단체가입을 권고한 분은 천 신부님이 처음이었다. 게다가 내 세례명을 아는 걸 보면 벌써부터 나를 마음에 둔 듯싶었다. 신부님이 추천하는 단체라면 틀림없는 단체라 여겼다. 병세가 심각한 상태에서 단체 활동은 엄두도 내지 못할 일이었으나 "예, 그렇게 하겠습니다" 하고 거리낌 없이 응낙했다.
 이 단체가 레지오 마리애였다. 내가 영세 때 어느 자매의 부탁을 받고 매일 바친 뗏세라가 다름 아닌 레지오 마리애를 위한 기도문이었으니 기묘한 인연이었다. 그날 참석한 쁘레시디움은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된 세 쁘레시디움 중 하나인 `죄인의 의탁`이었다.
 나는 하느님의 오묘한 섭리에 감탄했다. 밤낮없이 몰아치는 고통 속에서 생사의 기로에 있던 나를 레지오로 이끄셨음은, 당신의 자비요 은총이었다. 당신께서 역사하지 않으셨다면 그 같은 일이 이뤄질 수 없었다.
 여느 예비단원처럼 3개월간 수련기를 거치고 선서를 했다. 나에게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열어준 레지오 마리애 정단원이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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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08-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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