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1>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9)(중)

주교 서임권 지킨 보름스 협약 공식 확인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 교황 그레고리오 7세와 카노사 성 소유주 토스카나 백작 부인 앞에서 무릎을 꿇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배경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1123)는 그 전년도에 열린 보름스 협약을 교회가 공식 승인하고자 소집한 공의회입니다. 보름스 협약은 한마디로 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권을 둘러싼 논쟁을 일단락지은 협약입니다. 그 배경을 살펴보는 것은 또한 제1차 라테라노 공의회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미 제2차 니케아 공의회(787)에 이어 제4차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의회(869~870)에서도 세속 권력이 성직자 임명에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거듭 규정했지만 이후에도 이 규정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여기서 잠시 첫 천년기 후반 유럽 역사를 되돌아봅니다. 로마 교회, 정통 신앙의 수호자임을 자처한 카를 대제(혹은 샤를 마뉴, 재위 766~814) 때에 통일 유럽을 이뤄 전성기를 누렸던 프랑크 왕국은 9세기 중엽 왕국이 동ㆍ서ㆍ중 프랑크 셋으로 나뉘면서 황제 권력도 약화됩니다. 지방 제후(귀족)들이 부상하면서 주교들은 제후들과 결탁하기도 하고 제후들에게 놀아나기도 하지요. 로마 또한 황제의 영향력이 미치지 못하면서 교황이 귀족들에게 휘둘리는 일이 생깁니다. 귀족들은 마음에 맞지 않은 교황을 몰아내고 대립 교황을 세우는 일까지 벌어지지요. 평신도(귀족, 국왕)에 의한 성직 서임과 성직 매매 같은 불미스러운 일이 여기저기서 생겨납니다.
 하지만 교회를 내부로부터 개혁하고 쇄신하려는 움직임도 일어납니다. 대표적인 것이 10세기 초 프랑스 중동부 부르고뉴 지방에 있는 클뤼니 수도원에서 시작된 개혁입니다. 클뤼니 개혁은 11세기 후반 교황 그레고리오 7세 개혁으로 이어지면서 꽃을 피웁니다.
 한편 10세기 중엽 동프랑크 왕국 영토였던 독일을 중심으로 중앙집권 체제를 지닌 강력한 군주가 나타납니다. 오토 1세(재위 936~973)였습니다. 그는 독일 여러 제후국가(공국)들을 평정함은 물론 프랑스와 이탈리아까지 평정합니다. 962년에는 로마에서 교황 요한 12세를 내세워 성대한 대관식을 치르고 나라 이름을 신성로마제국이라고 부릅니다. 옛 로마제국의 뒤를 잇고 또 그리스도교를 통치 지주로 삼아 정교 일치의 통일 제국을 이룬다는 뜻에서였습니다.
 오토 1세는 제국의 황제이자 교권의 수호자였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교황권보다 우위에 있었습니다. 주교와 수도원장 임명에 개입하는 것은 물론 지방 영주들을 견제하기 위해 주교들에게 봉토와 함께 세속 영주들이 갖는 속권들을 부여했습니다.
 오토 1세의 이런 정책은 하인리히 3세(재위 1039~1056) 때에 오면 절정에 이릅니다. 그는 주교들을 임명하면서 영적 권한의 상징인 주교 반지와 주교 지팡이를 주고 복종 서약까지 받았습니다. 당시 로마는 귀족들 다툼으로 한꺼번에 교황이 세 명이나 생기는 등 몹시 혼란스러웠습니다. 그러자 그는 이 세 교황을 다 폐위시키고 로마인들이 선출한 주교를 새 교황으로 임명합니다.
 강화된 황제권은 교회를 귀족 제후들의 등쌀에서 보호하는 역할도 했지만 또한 교회 자체의 자유와 권리를 제한하는 짐이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황제권으로부터 교권을 수호하면서 교회 개혁을 이루려는 교황들이 있었습니다. 교황 레오 9세(재위 1049~1054)와 니콜라오 2세(재위 1059~1061)가 그런 교황이었습니다. 특히 니콜라오 2세는 착좌하자마자 교황 선거법을 제정해 추기경들로만 교황을 선출하도록 합니다. 로마의 귀족 평신도들이 교황을 선출하고 멋대로 다루려는 것을 막기 위한 획기적 조치였습니다.
 이 새로운 교황선거법에 따라 두 번째로 교황이 된 인물이 그레고리오 7세(재위 1073~1085)입니다. 이미 부제 때부터 교회 개혁을 위해 노력해온 그는 교황이 되자 △성직매매 금지 △ 평신도(국왕이나 제후)의 성직자 서임 금지 △사제 독신 및 윤리 생활 강화라는 세 가지 측면에 역점을 두고 개혁의 불을 지핍니다.
 그레고리오 7세는 교황령을 발표해 그리스도교의 으뜸인 교황은 주교들 일에 당연히 개입할 수 있다고 밝혔습니다. 그뿐 아니라 제후나 국왕에게 윤리적 문제가 있을 때는 폐위할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것도 분명히 했습니다. 교황 앞에서는 제후나 국왕이라 하더라도 평신도에 불과하다는 것이 그레고리오 7세의 지론이었습니다.
 세계사에서 유명한 `카노사 굴욕` 사건이 바로 그레고리오 7세 교황 때 일이었습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4세는 평신도의 성직자 서임 금지령에도 불구하고 밀라노 주교 선출에 개입합니다. 그레고리오 7세에게서 강력한 경고를 받자 하인리히 4세는 교회회의를 열어 주교들을 선동해 오히려 교황의 폐위를 선언하지요. 그렇지만 그레고리오 7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하인리히 4세에 대해 파문이라는 초강경 수를 놓습니다. 결국 힘 겨루기에서 진 하인리히 4세는 1077년 초 교황이 머무는 이탈리아 카노사로 가서 참회복을 입고 성문 앞에서 3일 동안 기다린 끝에 사면을 받습니다. 이것이 `카노사 굴욕`으로 알려진 사건이지요.
 이 사건은 단순히 교황권과 속권의 대립이 아니라 성직자 서임이라는 교회 고유한 권리에 대한 세속 권력의 부당한 간섭에 맞서 교권을 확립한 사건이었고, 교회 개혁의 강도를 드러낸 사건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레고리오 7세 교황의 강력한 개혁에도 불구하고 교권과 세속 권력과의 마찰과 다툼은 계속됐고, 세속 권력의 성직자 서임 문제도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사이에 현명한 타협안이 나왔습니다. 당시 주교는 지역 교회의 책임자라는 영적 권한과 함께 지방 영주(또는 제후)에 해당하는 세속 권력도 함께 지니고 있었습니다. 이런 현실을 감안해서 영적 종교적 권한은 교회가 부여하고 세속적 권한은 세속 권력이 부여한다는 대안이었습니다.
 구체적으로, 성직자단인 주교좌성당 참사들이 주교를 선출하면 관구장 주교가 승인하고 주교로 축성합니다. 여기에 황제는 원칙적으로 개입할 수 없도록 했습니다. 다만 후보가 여럿일 경우에는 황제가 결정할 수 있었습니다. 황제는 주교 선출에 개입하지는 못하지만 주교의 세속적 지위에 대한 권한을 부여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주교에게 영주에 해당하는 세속적 지위와 특권을 부여하고 재산과 토지도 하사했습니다. 반대로 주교는 영주로서 황제에게 충성을 서약해야 했습니다.
 이런 내용을 가지고 교황 갈리스토 2세(재위 1119~1124)와 신성로마제국 황제 하인리히 5세(재위 1106~1125)는 1122년 9월 23일 독일 보름스에서 협약을 체결합니다. 이것이 바로 보름스 협약 혹은 보름스 정교조약입니다.
 보름스 협약으로 성직 서임권 문제를 일단락 지은 교황 갈리스토 2세는 선임 교황들이 추진한 교회 개혁 정책을 계속 추진하기 시작합니다. 더욱이 교회는 전임 교황들인 파스칼 2세(재위 1099~1118)와 젤라시우



가톨릭평화신문  2011-08-21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2

로마 12장 16절
서로 뜻을 같이하십시오. 오만한 생각을 버리고 비천한 이들과 어울리십시오. 스스로 슬기롭다고 여기지 마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