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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29> 제2차 리옹 공의회(하)

교황 선거법은 지금까지, 십자군은 물거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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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1274년에 개최한 제2차 리옹 공의회 모습.
 

**공의회 이후

 엄격한 콘클라베를 도입한 교황 선거법 제정, 동방 교회와 재일치, 십자군 지원은 14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제2차 리옹 공의회의 대표적 결정 사항들입니다. 이런 결정들의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요.
 
 ◇교황 선거법
 추기경들이 콘클라베(`열쇠로 잠근다`는 뜻으로 교황 선거를 위해 외부와 차단된 곳)에 들어간 후 3일 안에 교황을 선출하지 않으면 추기경들에게 점심과 저녁 중 한 끼만 제공하고, 다시 5일이 되도록 교황을 선출하지 못하면 빵과 포도주와 물만 제공한다는 엄격한 규정을 담은 교황 선거법(우비 페리쿨룸). 이 법은 어느 정도나 효력을 낳았을까요?
 제2차 리옹 공의회를 개최한 교황 그레고리오 10세가 선종한 1276년. 새 선거법 규정대로 후임 교황을 선출하러 모인 추기경들은 콘클라베 첫 날에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인노첸시오 5세 교황입니다. 그러나 그는 5개월 만에 선종합니다. 다시 콘클라베가 열렸습니다. 이번에는 일주일 만에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하드리아노 5세 입니다. 이렇게 본다면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가 적어도 교황을 빨리 선출하도록 했다는 점에서 분명 효과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하드리아노 5세는 한 달 이레 만에 선종합니다. 교황 착좌식도 치르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하드리아노 5세는 선종하기 전에 이 엄격한 콘클라베 선거법을 중단시켜 버립니다. 추기경들이 늙고 병들고 주교품도 받지 못한 자신을 교황으로 선출한 것이 엄격한 콘클라베 규정 때문이라고 생각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이것이 계기가 돼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는 유명 무실해졌고, 때로는 6~7개월씩 교황좌가 공백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292년 니콜라오 4세 교황이 선종한 후 또 다시 문제가 생깁니다. 교황좌가 27개월이나 빈 것입니다. 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는 이런 폐단을 차단하기 위해 사장되다시피한 1274년 제2차 리옹 공의회 교황 선거법 곧 엄격한 콘클라베 제도를 다시 부활시켰습니다.
 이 콘클라베 제도는 여러 차례 변경 수정됐습니다만 기본 취지는 오늘날까지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참고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1996년 교황령 `주님의 양떼`를 발표, 이전의 교황 선거법을 개정했습니다.
 
 ◇동방 교회와 재일치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가 보낸 사절들이 공의회에 참석해서 교황의 수위권과 연옥 교리, 일곱 성사를 인정하고, 성령이 성부에게서만 아니라 성부와 성자에게서 발하신다는 뜻의 필리오케(filioque) 문구를 신경에 포함시켜 고백했습니다. 이로써 동방 교회와 재일치가 이뤄진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도 공의회에 참석한 이들은 동방 교회를 대표하는 주교들이 아니라, 비잔틴 황제가 보낸 사절들이었습니다. 또 비잔틴 황제가 사절들을 파견한 것은 교회 일치 정신보다는 교황권을 이용해 비잔틴 제국을 넘보는 시칠리아 왕 샤를의 위협에서 벗어나고 제국을 이어가려는 정치적 동기가 크게 작용했습니다.
 황제 사절들은 그리스로 돌아갔지만 동방 교회 주교들은 이 일치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흐르면서 또 다른 문제가 생겼습니다. 교황 마르티노 4세(재위 1281~1285)가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를 파문한 것입니다. 마르티노 4세는 당시 이탈리아 반도의 실세 시칠리아 왕 샤를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샤를의 반대 세력에 대해서는 파문으로 징벌했습니다. 샤를이 동방 비잔틴 제국을 정복하려 했을 때 교황은 이를 측면 지원했고, 그 결과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와 결별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위태했던 일치의 끈은 교황의 비잔틴 황제 파문으로 다시 끊어지고 말았습니다.
 
 ◇십자군 지원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은 성지 회복에 대단한 열정을 지녔던 것 같습니다. 교황으로 선출될 즈음 이미 십자군에 참가해 영국 왕자 에드워드와 함께 예루살렘이 멀지 않은 팔레스티나 땅 아크르에 있었습니다. 오늘날 아코라고 불리는 지중해 연안의 이 도시는 당시 십자군 요새였습니다.
 그런 상황이었던 만큼 그레오리오 10세는 제2차 리옹 공의회에서 십자군 지원을 위해 모든 성직자에게 수입의 10를 6년 동안 의무적으로 내도록 결정했지요. 12번째 세계 공의회인 1215년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가 성직자들에게 수입의 5를 3년 동안 십자군 지원금으로 내도록 한 것과 비교하면 4배나 많습니다.
 그뿐 아니라 동방 교회와 재일치를 공의회의 주요 목표로 삼고 비잔틴 황제의 사절들을 공의회에 초청한 것 역시 사실은 십자군 지원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동방 교회와 협력하지 않고서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공의회 이후 교황의 십자군 지원은 어떻게 됐을까요? 공의회가 끝나고 교황은 이듬해 오늘날 스위스 땅 로잔에서 독일 왕 루돌프를 만나서 루돌프 왕의 신성로마황제 대관식을 하기로 합의하고는 로마로 가는 길에 피렌체 남쪽 아레초에서 열병으로 선종합니다.
 십자군 원정에 의욕을 불태웠던 그레오리오 10세의 타계는 십자군 원정 계획에도 치명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게다가 후임 교황 2명이 잇따라 단명하고 세 번째로 교황이 된 마르티노 4세가 비잔틴 황제 미카엘 8세를 파문해 버립니다. 동방 교회를 십자군 원정의 한 축으로 삼고자 공의회에서 동방 교회와 재일치까지 이룬 그레고리오 10세 교황의 노력과 의도가 완전히 물거품이 되고 만 것입니다.
 십자군 원정이 흐지부지되면서 1291년 지중해 연안의 십자군 요새 아크르가 사라센에 의해 함락당하고 맙니다. 이로써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의 호소로 시작된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은 사실상 끝나고 말았습니다.
 
 제2차 리옹 공의회의 직접 결과는 아니지만 공의회 기간에 사절로 참석한 타타르(몽골)족 가운데 한 명(혹은 두 명)이 세례를 받고 돌아간 것도 주목할 만합니다. 이것이 계기가 돼 몽골에 가톨릭이 전해졌고 교황 니콜라오 4세(재위 1288~1292)는 프란치스코회 신부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을 베이징에 파견합니다. 몬테코르비노의 요한은 1294년 베이징에 도착해 괄목할 만한 결실을 거두고 나중에는 초대 주교가 되지요. 이후 프란치스코회와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이 중국에 들어가 선교활동을 펼쳤으나 14세기 중엽 원 나라가 망하고 명나라가 들어서면서 선교사들도 모두 쫓겨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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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9-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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