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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0> 15차. 비엔 공의회(1311~12)(상)

교황 영적 권위 누르려는 세속 권력 득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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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경

 1308년 8월 12일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는 프랑스 남서부 푸아티에에서 칙서를 발표, 2년 후인 1310년 10월 1일 비엔에서 보편 공의회를 소집한다고 공포했습니다. 비엔은 프랑스 중서부에 있는 도시였습니다. 성전 기사단 폐쇄 문제와 선임 교황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에 대한 사후 재판 등이 주요 안건이었습니다. 왜 이 문제들이 공의회 안건으로 올랐을까요?
 
 ◇성전 기사단
 교황 우르바노 2세가 1095년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에 예루살렘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을 호소한 이후 많은 나라들이 십자군에 참가했습니다. 십자군이 활기를 띠면서 이른바 `기사 수도회`들이 생겨났습니다. 수도자들과 똑같이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약하면서도 기사들처럼 직접 전투를 치르고 가난한 이와 병자들을 돌보며 특히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일을 주요 임무로 수행했습니다.
 1100~1300년 사이에 이런 기사 수도회들은 12개 정도가 활약하고 있었는데 성전 기사 수도회(줄여서 성전 기사단)은 요한 기사 수도회(몰타 기사단), 독일 기사 수도회 등과 함께 대표적 기사 수도회들 가운데 하나였습니다.
 1119년 예루살렘 솔로몬 성전에서 기사 8명이 예루살렘 총대주교 앞에서 청빈ㆍ정결ㆍ순명을 서약함으로써 탄생한 성전 기사단은 무기를 휴대하고 다니면서 성지 순례자들을 보호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과 그리스도의 가난한 형제 군인들`이라고 불리던 성전 기사단은 특히 당대 유명한 성인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도(1090~1153)에게서 격찬을 받은 후 급속도로 커졌습니다.
 12세기 중반이 되면서 유럽 곳곳에 지회들이 생겨났습니다. 또 교황을 비롯해 군주들과 귀족들, 후원자들에게서 토지나 재산을 기증받으면서 성전 기사단은 유럽 도처에서 엄청난 부를 축적하게 됐을 뿐 아니라 영향력도 커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일부에서는 불화가 생기고 심지어 수도원들끼리 싸움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1291년 팔레스티나에 남아 있던 십자군 최후의 보루 아크르 요새가 사라센에 의해 함락된 이후 성전 기사단은 파리를 근거지로 삼아 활동했는데 당시 프랑스 왕은 미남 왕이라는 별명이 붙은 필리프 4세(재위 1285~1314)였습니다.
 필리프 4세는 야심이 있는 왕이었습니다. 프랑스 땅에서는 왕이 교회보다 우위의 권력을 지녀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또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자 한 그는 남부 기옌 지방을 차지하고 있는 영국을 몰아내는 데 온 힘을 쏟았습니다. 그래서 처남이기도 한 영국 왕 에드워드 1세와 7년 동안 두 차례 전쟁을 벌였습니다. 전쟁 비용을 조달하기 위해 성직자들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하고 금융업을 하는 유다인들에게도 많은 빚을 졌습니다.
 재정이 바닥이 나고 달리 빚을 갚을 길이 없자 필리프 4세는 1306년 유다인들을 체포해 재산을 몰수하고 모두 추방해 버리는 비상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런 다음에는 막대한 부를 지닌 성전 기사단으로 눈을 돌립니다. 기사단 일부에서 문제가 있는 것을 트집 삼아 1307년 8월에는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성전 기사단에 대한 조사를 하라고 요구합니다. 교황이 미적거리자 그해 10월 13일 금요일에 필리프 4세는 프랑스에 있는 성전 기사단 회원을 모두 체포해 그들의 재산을 모두 몰수하고는 혹독한 고문을 가합니다. 거짓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이를 토대로 교황 클레멘스 5세에게 성전 기사단을 해체하도록 계속 압박을 가합니다.
 
 ◇보니파시오 8세 교황
 1294년 12월 10일 교황 첼레스티노 5세가 재위 3개월 열흘 남짓 만에 사임을 발표합니다. 곧 이어 콘클라베가 열리고 이탈리아 귀족 가문 출신인 베네딕토 가예타니 추기경이 교황으로 선출되는데 그가 보니파시오 8세(재위 1294~1303) 교황입니다.
 1300년에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성년을 선포한 교황으로도 유명한 보니파시오 8세는 볼로냐에서 교회법을 전공했으며 영국과 프랑스 대사를 지내는 등 교황 사절로서 활동했습니다. 30년 이상 교황청에 몸 담아 있으면서 세속 권력에 휘둘리곤 하는 교황들을 본 보니파시오 8세는 세속 권력을 능가하는 절대 권위를 지닌 교황권이 필요함을 절감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교황으로서 영적 분야에서 전권을 갖고자 한 보니파시오 8세, 그리고 강력한 중앙집권제를 통해 프랑스 영토 안에서는 성직자들에 대해서도 왕의 권한을 앞세우려 한 필리프 4세. 두 사람은 서로 부딪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프랑스 왕이 성직자들에게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교황이 금지시키고, 교황이 임명한 주교를 프랑스 왕이 첩자 혐의로 체포하는 등 보니파시오 8세와 필리프 4세의 대결 구도는 악화일로를 걷습니다. 마침내 교황은 1302년 11월 18일 칙서 `하나이고 거룩한 교회`(Unam Sanctam)를 발표합니다. 교황의 영적 권위가 모든 세속 권력보다 우위에 있다는 선언이었습니다.
 그러자 필리프 4세는 측근을 통해 교황을 비방하고 모독하는 일들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교황이 전임 교황 첼레스티노 5세를 암살했으며, 영혼 불멸을 부정했다는 비난 등이었습니다.
 결국 보니파시오 8세는 필리프 4세를 파문키로 작정합니다. 그러나 파문 교령을 발표하기 전날 교황은 필리프 4세 측근인 기욤 노가레 등이 이끄는 폭도들에게 체포되고 구타당하기까지 합니다. 교황은 그 후유증을 견디지 못하고 얼마 후 선종합니다. 1303년 10월 11일이었습니다.
 보니파시오 8세 후임 교황 베네딕토 11세(재위 1303~1304)는 필리프 4세와는 평화를 유지하면서도 전임 교황을 모독한 이들을 단죄하는 일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그는 재위 8개월 만에 선종하고 맙니다.
 이후 콘클라베가 열렸으나 추기경단의 분열로 후임 교황을 근 1년 가까이 선출하지 못합니다. 그러다가 필리프 4세의 개입으로 가까스로 후임 교황이 선출되는데 그가 클레멘스 5세 교황이었습니다.
 클레멘스 5세는 필리프 4세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대관식을 로마에서 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교황 거처를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옮겨 버립니다. 세계사에서 흔히 말하는 `아비뇽 유수` 혹은 `교황의 바빌론 유배`가 시작된 것입니다. 하지만 교황 스스로 결정한 일이기에 유수 또는 유배라는 표현은 적절치가 않습니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로서는 보니파시오 8세 사망과 관련해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을 어떻게든 모면해야 했습니다. 그러려면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비난과 고발 내용이 사실임을 입증해 보여야 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보니파시오 8세에 대한 사후 재판을 열도록 클레멘스 교황을 압박했고 결국 이것이 공의회 주요 안건에 포함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창훈 기자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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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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