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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1> 15차. 비엔 공의회(1311~12)(하)

성전 기사단 해체, 십자군 원정은 무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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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엔 공의회 모습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공의회 개최와 과정

 가톨릭교회 역사상 15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비엔 공의회는 당초 교황 클레멘스 5세가 발표한 1310년 10월 1일보다 1년 이상 늦은 1311년 10월 16일 비엔 주교좌성당에서 개회합니다.
 개회가 늦은 이유는 성전 기사단에 대한 재판 때문이었습니다. 1307년 10월 13일 프랑스 왕 필리프 4세가 성전 기사단을 일제히 체포한 후 갖은 고문을 다해 거짓 자백을 받아냈습니다. 이에 놀란 교황 클레멘스 5세는 자신이 직접 나서 기사단 지회가 있는 교구마다 특별 법정을 설치토록 합니다. 그리고 기사단원들에 대한 마지막 재판은 관구 회의에서 주교들이 결정토록 하면서 공의회에서는 성전 기사단 폐지 여부에 대한 최종 결정을 하기로 했는데 그 과정이 늦어진 것입니다.
 그래서 교황은 1310년 4월에 다시 칙서를 발표해 공의회 개회 일정을 1년 후로 늦췄습니다. 그 결과 실제 개막일은 1311년 10월 16일이 된 것입니다. 참석자는 추기경 20명을 비롯해 대주교와 주교가 합쳐서 122명, 수도원장 38명이었습니다. 그 밖에 왕들이 보낸 사절들, 주교좌성당 참사 대표들과 기타 보조자들을 포함하면 300명 정도가 됐습니다.
 어쨌든 클레멘스 5세는 비엔 주교좌 성당에서 개회식을 직접 주재합니다. 개막 연설에서 교황은 공의회 의제를 성전 기사단 문제, 성지 탈환, 교회 내부 개혁 등 3가지로 제시합니다. 교황은 또 이 문제들을 다룰 특별 소위원회들을 구성토록 합니다. 소위원회가 조사를 마친 후 해결책을 마련해 교황과 추기경단에게 제출하고 교황과 추기경단이 승인하면 공의회 전체 회의에서 통과시키는 형태로 일이 추진될 예정이었습니다. 하지만 교황은 개회식에서 다음 전체 회의 일정을 공지하지 않았습니다.
 안건 가운데는 아무래도 성전 기사단 문제가 핵심이었습다. 해당 특별 소위원회는 자체 조사 결과 성전 기사단에 호의적인 방향으로 해결 가닥을 잡았습니다. 필리프 4세와 그 측근들이 성전 기사단에 대해 한 비난과 고발은 상당 부분 허위라고 본 것입니다. 하지만 필리프 4세의 거듭된 압력에 교황 클레멘스 5세는 굴복하고 말지요. 그리하여 1312년 4월 제2차 전체회의에서 성전 기사단을 폐지한다는 교황 칙령이 선포됩니다. 그러나 이 칙령은 성전 기사단 폐지가 판결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교황의 행정 명령에 의한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교황은 이어 한달 후 성전 기사단 재산에 대해 일부를 제외하고는 요한 기사 수도회(몰타 기사단)에 넘긴다는 칙령을 발표합니다.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성전 기사단의 재산을 자신이 차지하려고 했습니다만 뜻대로 이뤄지지 않은 것이지요. 그뿐 아니라 공의회는 필리프 4세가 요구했던 보니파시오 8세 교황의 사후 재판 건에 대해서는 논의를 중단해 버립니다.
 그렇다면 다른 안건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십자군 원정 문제와 관련해서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십자군 원정을 떠나기로 약속합니다.
 비엔 공의회는 사실 십자군 원정보다 교회 개혁에 대해 더욱 관심을 쏟았습니다. 교회 개혁과 관련해서 교황은 주교들에게 자기 교구에서 무슨 문제가 있는지를 파악하고 이를 어떻게 고쳐야 할지 의견을 내도록 했습니다. 이에 따라 주교들이 제출한 문건들에 대한 심의가 2차 회의 때 집중적으로 논의돼 많은 법령들이 마련됐습니다.
 공의회는 이 밖에도 당시 엄격파와 온건파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던 프란치스코회 내부 분열 문제를 논의하고, 독일 지역을 중심으로 퍼져 있던 여성 공동체인 베긴회와 남성 공동체 베가르회의 문제들도 다뤘습니다.
 비엔 공의회는 1312년 5월 6일 제3차 전체회의를 열어 모두 38개 법령을 채택하고 폐막합니다.
 
▨공의회 결과와 그 이후 

 이전 공의회들 예컨대 제4차 라테라노 공의회(1215)나 제1차 리옹 공의회(1245), 또 2차 리옹 공의회(1274)의 경우 공의회가 끝난 후 교황이 법령을 정리해 법령집으로 공포했습니다.
 그런데 클레멘스 5세 교황은 비엔 공의회에서 승인한 법령들을 엮어 법령집으로 발표하는 일을 마무리짓지 못한 채 1314년 4월 20일 선종합니다. 공의회 법령들은 후임 교황 요한 22세(재위 1316~1334)가 교회 개혁에 관한 법령을 일부 수정해 1317년 공포합니다. 이로써 비엔 공의회의 결정들이 비로소 법적 효력을 지니게 된 것입니다. 요한 22세 교황이 공포한 이 법령을 「클레멘스 법령집」이라고 부르지요.
 비엔 공의회에서는 38개 법령을 채택했다고 하는데 「클레멘스 법령집」에는 그 절반만 수록돼 있습니다. 그 중 몇 가지를 보면 우선 공의회가 당시 프란치스코회 내분을 화해시키려고 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프란치스코회는 설립자인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가 선종한 후 엄격한 회칙 준수와 특히 극단적 청빈을 주장하는 엄격파와 이를 융통성 있게 적용하려는 온건파로 나뉘어 있었는데 공의회는 두 파의 화해를 모색한 것입니다. 하지만 공의회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 두 파의 대립은 이후에도 계속됩니다.
 「클레멘스 법령집」을 통해 알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여성 평신도 공동체인 베긴회와 이와 유사한 남성 공동체인 베가르회에 대한 공의회의 단죄입니다. 이들은 정규 수도자들이 아니지만 공동생활을 하면서 엄격한 금욕과 청빈을 실천했는데 일부 공동체들에서 기도와 성사를 부정하는 등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공의회는 이들 문제가 있는 일부 공동체들에 대해서 단죄합니다. 베긴회와 베가르회 전체를 단죄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클레멘스 법령집」은 이 밖에도 공의회가 교회 개혁과 관련해 고리대금 문제, 성직자에 대한 폭행, 이단심문의 폐해 같은 문제들을 다뤘음을 확인해 주고 있습니다.
 한편 프랑스 왕 필리프 4세는 공의회 때 십자군 원정에 나서겠다고 약속했습니다만, 이 약속은 빈말이 되고 맙니다. 필리프 4세는 클레멘스 5세 교황이 선종하고 나서 그해 1314년 11월에 사망합니다.
 필피프 4세는 죽기 전에 한 가지 일을 더 마무리 짓습니다. 자신이 눈엣가시처럼 여긴 성전 기사단 마지막 대원장 자크 드 몰레(1244~1314)를 제거한 것입니다. 그 전해인 1313년 몰레는 기사단의 다른 세 고위 지도자와 함께 재판을 받고 종신형에 처해집니다. 물론 몰레는 재판관들이 기사단에 씌운 혐의들을 모두 부인했지만 소용이 없었습니다. 얼굴이 잘 생겨서 미남왕이라는 별명을 지닌 필피프 4세는 얼굴 값과는 달리 1314년 3월 8일 파리에서 몰레를 비롯해 동료 회원들을 화형에 처합니다. 이로써 성전 기사회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게 됩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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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09-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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