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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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세계 공의회] <32> 16차. 콘스탄츠 공의회(1414~1418)(상)

두 교황과 두 교황청으로 교회의 대분열이 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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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비뇽 시대를 마감하고 로마로 귀환하는 교황 그레고리오 11세.
출처=한국가톨릭대사전
 

▨ 배경


 교회사에서 16번째 세계 공의회로 기록되는 콘스탄츠 공의회는 이른바 서구 대이교((西毆 大離敎)라고 부르는 서방 교회의 대분열, 이 대분열의 해법으로 부각된 공의회 우의설, 그리고 이를 실제로 적용하려 한 피사 공의회를 시대적 배경으로 하고 있습니다.
 
 ◇서구 대이교
 비엔 공의회(1311~1312)를 개최한 교황 클레멘스 5세(재위 1305~1314)가 1309년 프랑스 남부 아비뇽으로 거처를 옮긴 이후 후임 교황들은 한동안 아비뇽을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한편으로는 교황들이 당시 실세였던 프랑스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한 탓도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이탈리아 내부 정세의 불안정 특히 교황 영토에서의 소요 사태 등이 교황들을 아비뇽에 눌러앉게 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다가 교황 그레고리오 11세(재위 1370~1378)가 로마 귀환을 결행합니다. 그는 시에나의 성녀 가타리나(1347~1380)의 강력한 권고를 받아들여 1377년 1월 7일 로마에 입성합니다. 그는 당시 교황청이 있던 라테라노 대성전이 아니라 바티칸에 거처를 정합니다. 이미 선대 교황 니콜라스 3세(재위 1277~1280)가 교황궁을 확장하고 정원까지 마련해 놓은 바 있습니다. 이로써 `바티칸 시대`가 열립니다.
 그런데 이듬해 그레고리오 11세 교황이 선종하면서 문제가 생깁니다. 클레멘스 5세부터 그레고리오 11세까지 아비뇽 시대를 장식한 교황들은 모두 프랑스 출신이었습니다. 로마 시민들은 프랑스인 교황이 또 탄생하면 다시 아비뇽으로 돌아갈 것을 염려했습니다. 당시 로마에 있던 추기경 16명 가운데 11명이 프랑스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인들은 장례식이 채 끝나기도 전에 이탈리아인으로 후임 교황을 선출할 것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였습니다.
 추기경들은 겁이 나서 로마 출신인 연로한 테발데스키 추기경에게 억지로 교황 옷을 입혀 교황좌에 앉히고는 로마인 교황이 선출됐다고 속여 군중들을 해산시켰습니다. 그런 다음에 애초 교황 후보로 내정한 이탈리아 바리 대교구장 프리냐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그가 교황 우르바노 6세(재위 1378~1389)입니다.
 아비뇽 교황청에서 근무하기도 했던 우르바노 6세는 행정력과 교회 쇄신 의지까지 갖추고 있었지만 독선적인 면이 강했습니다. 게다가 추기경들의 부도덕성과 사치스러운 행태를 신랄하게 비판했습니다. 기득권을 잃을까 우려한 추기경들은 우르바노 6세에게 교황직을 수행할 수 없는 인격 파탄자라는 혐의를 씌우더니 마침내는 교황 선출 자체를 무효라고 주장하면서 1378년 8월 우르바노 6세를 해임해 버렸습니다. 이에 맞서 우르바노 6세는 자신이 적법하게 선출된 교황임을 내세우고, 추기경 29명을 따로 임명해 교황청을 다시 구성합니다.
 그러자 우르바노 6세 해임에 앞장섰던 추기경들은 나폴리 왕국에서 회의를 열어 새 교황을 선출합니다. 그가 대립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1378~1394)입니다. 클레멘스 7세는 자신을 지지하는 추기경들을 데리고 1379년 5월 아비뇽으로 가서 교황청을 구성합니다. 두 명의 교황과 두 개의 교황청이 생기는 교회 역사상 초유의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유럽 그리스도교 세계도 우르바노 6세를 지지하는 쪽과 클레멘스 7세를 지지하는 쪽으로 양분됐습니다. 이런 혼란상이 40년이나 지속됩니다. 이 사태를 서구 대이교라고 부릅니다.
 1389년 로마 교황 우르바노 6세가 선종합니다.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로마 추기경들이 우르바노 6세의 후임을 선출하지 않는다면 자신이 자연히 적법한 교황이 될 것이라고 내심 기대합니다만,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교황 보니파시오 9세(재위 1389~1404)입니다.
 아비뇽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아비뇽에서 별도 교황청을 차린 지 15년 후인 1394년 선종합니다. 마찬가지로 후임 교황이 나오지 않는다면 대분열은 자연적으로 종식될 참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비뇽 추기경들도 후임 교황을 선출합니다. 바로 두 번째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재위 1394~1423)입니다.

 ◇공의회 우위설
 공의회 우위설은 한 마디로 교황보다 세계 공의회(보편 공의회)가 우위에 있다는 설입니다. 공의회 우위설은 갑자기 생겨난 이론이 아니지만 서구 대이교 사태와 때를 같이해 수면 위로 부상하기 시작했습니다.
 공의회 우위설은 교황이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자 교회의 머리임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군주가 다스리는 나라와 같은 조직이 아니라 머리와 지체들이 하나를 이루는 유기체입니다. 머리인 교황은 각 지체들에 대해 우위에 있지만 유기체 전체를 대표하는 세계 공의회보다 우위에 있지 않습니다. 따라서 교황이 신앙의 오류를 범하거나 교회에 심각한 해악을 끼칠 경우 공의회는 이를 판단하고 교황에게까지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것이 공의회 우위설을 내세우는 이들의 주장입니다.
 아비뇽 교황과 로마 교황이 서로 타협해서 한쪽이 양보한다면 공의회 우위설은 말 그대로 설로만, 따라서 이론으로만 그쳤을 것입니다. 하지만 양쪽 모두 서로 상대편에게 양보를 요구하다 보니 재일치가 이뤄질 수가 없었습니다.
 
 ◇피사 공의회
 교황들의 타협을 통한 교회 재일치가 기대난망이라고 여긴 양측 추기경들은 공의회 우위설을 바탕으로 문제를 해결키로 하고 전체 공의회를 개최키로 합니다. 이에 따라 1409년 3월 25일 피사에서 공의회(엄밀하게는 교회회의)가 소집됩니다. 참석자는 추기경들과 대주교, 주교들 외에 주교 대리인, 주교좌성당 참사회 대표, 수도원장과 수도원장 대리인 제후 사절들을 포함해 600명이 넘었습니다.
 추기경들은 로마 교황과 아비뇽 교황도 초청했지만, 두 교황 모두 초청을 거부하고 저마다 각기 별도 공의회를 소집합니다. 하지만 흐지부지되고 맙니다. 피사 공의회에서 주교들은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모두 교회 분열을 초래한 이단으로 몰아 해임, 단죄합니다. 그리고 그리스 출신인 밀라노 대주교를 교황으로 선출합니다. 그가 교황 알렉산데르 5세(재위 1409~1410)입니다. 이듬해에 알렉산데르 5세가 선종하자 추기경들은 후임 교황으로 요한 23세(재위 1410~1415)를 선출합니다.
 하지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습니다. 로마 교황 그레고리오 12세와 아비뇽 교황 베네딕토 13세 모두 피사 공의회 결정에 불복하고 여전히 교황직을 고수했기 때문입니다. 피사 공의회로 인해 이제는 교황이 세 명으로 더 늘어난 꼴이 되고 만 것입니다.
  이창훈 기자 changh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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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1-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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