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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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54) 하느님 뜻과의 조화 (18)

본질적으로 더 나은 것을 추구하는 인간/ 하느님 뜻에 합치될 때 진정한 초월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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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세상의 빛이다.’(요한 8,12)

삼위일체 하느님은 빛이시다. 그런데 이 빛은 홀로 고고히 빛나는, 우리와 동떨어져서 빛나는 그런 빛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요한 8,12)

하느님 모상대로 창조된 우리다. 하느님에게서 빛이 난다면 우리들에게서도 빛이 있다. 다만 숨겨져 있을 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온전한 형태가 된다면 우리에게서도 빛이 날 수 있다. 눈도 빛나고, 입도 빛나고, 손도 빛날 수 있다. 빛은 어디든 들어간다. 심지어는 어둠 속에도 들어간다. 오히려 빛은 어둠 속에서 가장 의미 있게 다가온다. 빛은 신앙인들에게도 찾아오지만, 사형수에게도 찾아간다. 비신자들에게서도 우리는 빛의 찬란함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빛의 삶’은 ‘초월적인 삶’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초월적인 삶을 살도록 창조됐다. 테니스 선수가 ‘조금 더’ 테니스를 잘 치려고 하고, 수영 선수와 육상 선수가 ‘조금 더’ 기록을 단축시키려 하는 것은 인간이 본질적으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것을 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초월의 성향을 뿌리로 가지고 있다는 증거다.

인간은 이렇게 초월적 성향을 가지고 있기에, 그 초월을 성취해 낼 때 가장 완전한 행복에 이를 수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초월을 성취해 낼 수 있을까.

우선 하느님과 합치된 삶을 살아야 한다. 초월의 가장 완벽한 형태가 하느님이기에 하느님과 합치될 때, 진정한 초월을 완성할 수 있다. 하느님과 합치하지 않고, 하느님의 뜻이 아닌 내 뜻대로만 산다면 그것은 초월의 삶이 아니다. 본능에 따르는 삶이다. 하느님의 힘을 받아야 초월적인 삶을 살 수 있다. 그렇지 않다면 동물의 삶과 다를 바 없다. 개구리도, 강아지도 본능에 따르는 삶을 산다. 개구리와 강아지는 성경책을 읽을 수 없다. 성인ㆍ성녀전을 읽는 강아지를 봤는가. 묵주기도를 하는 돼지를 봤는가. 초월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존재는 인간밖에 없다.

대부분 인간 사회의 문제는 본능적 삶을 살아가기 때문이다. 하느님과의 합치의 삶이 완전히 구현되면, 이웃에 대한 연민, 상황에 대한 융화, 세상에 대한 역량의 발휘가 일어난다. 이것이 초월이다.

하지만 인간은 완전하지 않기에 때로는 초월을 외면할 수 있고, 혹은 초월을 완전히 잊고 살 수 있다.

초월을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초월은 우리가 알아듣기 힘든 것, 저 멀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동안 많은 영성가들이 성인ㆍ성녀들의 신비적 초월을 이야기하고, 철학자들이 비인격적 초월에 대해 설명하다 보니 초월은 마냥 이해하고 성취하기 어려운 것으로만 이해돼 왔다. 초월은 특별한 사람들만 생각하고, 특별한 사람들만 성취해 내는 것으로 오해 받았다.

틀렸다. 우리가 일상에서 만나는 모든 것이 초월이고, 신비다. 초월은 평범함 속에 있다. 그래서 평범한 우리가 초월을 성취해 낼 수 있는 것이다.

눈의 초월, 손의 초월, 입의 초월, 수영하는 것의 초월, 등산하는 것의 초월, 성서에 대한 깊은 이해, 묵주기도에 대한, 성체 조배에 대한 깊은 초월…. 모두가 초월이고, 초월을 성취해야 한다.

하느님과 합치가 깊어지면 깊어질수록 그것이 초월이고, 이웃에 대해 연민을 더 가지게 되면 될수록 그것이 초월이고, 상황에 대해 융화하는 것이 심화 될수록 초월이다. 세상에 살아가면서 내 멋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참된 역량을 발휘하는 것, 그것이 바로 초월이다.

음식을 만들 때나 설거지 할 때 가족의 건강을 생각하며 정성스럽게 한다면 그것이 초월이고, 환경을 위해 쓰레기 하나 정성스럽게 버리는 것도 초월이다. 자부심이나 자만심이 아닌 진심 어린 동정심으로 넘어진 이웃의 손을 잡아주는 것도 초월이다.

하느님께서 지금 우리 집에 와서 설거지를 할 수 있는가. 하느님은 우리를 통해 설거지를 하신다. 우리를 통해 초월을 드러내신다. 개구리와 돼지에게서는 초월이 나오지 않는다. 본능만 나온다. 하느님은 당신의 초월을 세상에 드러내는 일을 인간을 통해 하신다. 그 초월을 드러내는 주인공은 나다. 내 안에서도 눈과 귀와 코와 입과 손과 발이 초월을 드러낸다. 이것들은 바로 초월의 기관들이다. 그래서 나는 초월을 위한 발전소다. ‘나’는 그냥 대충 ‘나’가 아니다.

하느님은 초월적 힘을 드러내라고 인간의 눈을 주셨다. 나의 눈은 강아지와 돼지의 눈이 아니다. 그 초월의 눈으로 세상을 보아야 한다. 초월의 입으로 말해야 하고, 초월의 손으로 악수하고 토닥거려야 한다. 나는 신의 눈, 신의 손, 신의 입을 가지고 있다. 하느님이 주셨다. 나는 이렇게 ‘이미’ 초월덩어리다.

그렇다면 나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초월의 삶을 살아야 할까.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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