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55) 하느님 뜻과의 조화 (19)

삼위일체 신비인 ‘중심’을 잡자/ ‘초월 덩어리’인 인간, 하느님 뜻과 조화돼 살아야/ 유혹받지 않는 신념인 확고함, 공명 위해 중요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초월, 영성….

많은 신자들이 이런 단어들을 어렵게 생각한다. 나와는 다른 세상의 말로 여기는 이들이 많다. 틀렸다. 하느님은 나를 애초에 ‘초월 덩어리’로 창조하셨다. 그렇게 우리는 초월의 눈과 초월의 손, 초월의 몸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온다. 당신의 능력이 온전히 인간 곳곳에 배어 있다.

그 좋은 초월의 손과 눈, 입, 몸을 가지고 하느님 뜻과 조화된 삶(공명의 삶)을 살아가면 된다.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공명의 삶이란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는 초월의 도구를 가지고 하느님과 합치하고, 이웃을 연민하고, 세상과 융화하고, 좋은 역량을 발휘하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에는 하느님 뜻과 조화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이런 삶은 초월의 도구들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초월의 눈으로 보지 않고, 초월의 귀로 듣지 않고, 초월의 손으로 어루만지지 않는다. 이는 기계가 고장 난 것이다. 고장 나면 고쳐야 한다. 이때 수리를 위해 사용하는 부품이 합치, 연민, 융화, 역량이다. 이 새 부품으로 갈아 끼워야 기계는 중심이 잘 갖춰져서 부드럽게 돌아간다.

순정 부품을 다시 장착할 때 초월의 몸에서 영적인 힘이 뿜어져 나온다. 사방에서 나를 흔들려고 해도 흔들리지 않는다. 우리가 이리저리 흔들리는 것은 중심이 잘 잡혀 있지 않아서 그렇다. 배가 흔들릴 때 예수님께서 어떻게 말씀하셨는가.

“그때 호수에 큰 풍랑이 일어 배가 파도에 뒤덮이게 되었다. 그런데도 예수님께서는 주무시고 계셨다. 제자들이 다가가 예수님을 깨우며, ‘주님, 구해 주십시오. 저희가 죽게 됐습니다’고 간청했다. 그러자 그분은 ‘왜 겁을 내느냐? 이 믿음이 약한 자들아!’ 하고 말씀하셨다. 그런 다음 일어나셔서 바람과 호수를 꾸짖으셨다. 그러자 아주 고요해졌다.”(마태 8, 24~26)

예수님의 호령 한 번에 바람과 호수가 잠잠해진다. 예수님과 함께라면 겁먹을 필요가 없다. 풍랑이 일어도 중심을 바로 잡을 수 있다. 이리 비틀, 저리 비틀거리다 물에 빠지지나 않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지금 중심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참으로 많다. 언제 물에 빠질지 모를 정도로 위태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일류 대학, 일류 직장에 들어가는 것이 중심을 잘 잡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중심은 다른 곳에 있다.

중심만 잘 잡으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영성 생활이다. 그 영성 생활 안에서 우리는 지금까지 한 번도 느끼지 못하던 행복을 만끽할 수 있다. 이러한 영성 생활은 특별한 고생과 극기, 희생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희생은 별도로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요구하시는 것이지 공명의 영성 생활 자체와는 그리 큰 상관관계가 없다.

어떤 이들은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삶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영성 생활을 희생이라고 생각한다. 바리사이파와 율법학자들은 예수님 시대에 어떻게 살았는가. 율법은 통제였다. 하느님 말씀을 그들은 통제와 규제로 알아들었다. 613가지의 법으로 스스로와 이웃의 삶을 옭아맸다. 하지만 예수님은 단 두 가지 계명으로 이를 요약한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그것이다.

독재가 통제이고, ‘아름다운 울림,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은 자유다. 하느님의 다른 이름이 자유다.

나는 ‘하느님’이라고 쓰고 ‘참 자유’라고 읽는다. 통제는 규칙성을 만들어 낼 수는 있겠지만, 조화를 창출하지는 못한다. 공명은 조화다. 이를 위해 중요한 성향이 하나 있다. ‘부드러움의 성향’이 그것이다.

아무리 하느님과 합치되었다고 해도, 아무리 이웃과의 연민, 세상과의 융화, 역량을 실천한다고 해도 인상을 찌푸리고 다닌다면 어떻겠는가. 딱딱해져서는 안 된다. 영성 생활을 성취한 사람은 부드럽다. 그러면서도 ‘확고함의 성향’을 가지고 있다. 확고함은 완고함과는 다르다. 완고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두 자신의 생각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런 사람이 종교지도자가 된다면 종교 내에서는 물론 종교 간 분열과 반목이 심해진다. 확고함은 유혹받지 않는 신념이다. 공명을 위한 확고함이 중요하다. 공명에는 나 자신이 존재하지 않는다. 내가 이미 하느님의 존재 안으로 빨려 들어간 상태다. 그러면 자연스레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부드러움’을 드러내 보이게 된다.

동물들은 오직 정해진 길만 가지만, 인간만이 동쪽으로 갈 수도 있고 서쪽으로 갈수도 있다. 럭비공처럼 돌아다닌다. 이러한 개방성 때문에 하느님 창조 사업에의 동참이 가능한 것이다. 그런데 동쪽으로 가든, 서쪽으로 가든 반드시 들러야 할 곳이 있다. 바로 중심이다. 어디를 가더라도 반드시 중심에 들렀다가 가야 한다. 십자가를 그려놓고 그 중심을 생각해보면 중심이 무엇인지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중심이 바로 삼위일체 신비다. 형성하는 신적 신비이다.


정영식 신부·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7-15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3

갈라 2장 20절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나는 사노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