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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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56) 하느님 뜻과의 조화 (20) 합치·융화의 삶 살면 우리 모습 환해진다

하느님 뜻과의 조화 ‘공명’은 진정한 의미의 사랑/ 부드러움과 확고함, 노력에 의한 습득 아닌 ‘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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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라!”

예수님의 절대적 명령이다. 이 말씀은 반드시 영성적 삶 안에서 구현돼야 한다.

하지만…. 너무 이 말을 많이 들어서일까. 세상에 넘쳐나는 말이 사랑이어서일까. 사랑에 대한 배신을 많이 당해서일까. 사랑의 의미가 너무 포괄적이어서일까. 솔직히 사랑이라는 말 하나만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기에는 추진력이 왠지 약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사랑처럼 변화무쌍한 것도 없다. 사랑은 어떤 때는 성실로, 어떤 때는 겸손으로, 또는 희생, 용기, 절제 등으로 다양한 모습을 드러내야 한다. 사랑은 무조건 남을 칭찬하는 것이 아니다. 진정한 조언도 사랑의 범주에 들어간다.

그래서 나는 너무 많이 사용돼 의미가 조금은 퇴색되어 보이는 ‘사랑’이라는 단어보다 ‘공명’(하느님 뜻과의 조화)을 더 선호한다. 공명이 곧 진정한 의미의 사랑이고, 사랑의 완성은 공명으로부터 출발한다.

공명을 구현하면 이웃과의 조화는 저절로 따라온다. 공명은 나만 잘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이웃, 상황, 세상과 함께 조화를 이루는 것이고, 그 조화가 나를 통해 구현되는 것이다.

이러한 공명을 위한 골자는 하느님과의 ‘합치’(congeniality), 주어진 삶 상황 안에서의 ‘융화’(compatibility), 한계를 가진 인간으로서 타인에 대한 ‘연민’(compassion), 그리고 이를 통한 인간 ‘역량’(competence)의 발휘다. 이 네 가지를 통해 우리는 하느님 뜻과의 조화로운 삶, 즉 공명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이 공명의 삶을 세상에 드러내는 것이다.

이를 위해선 또 ‘부드러움’과 ‘확고함’의 성향이 중요하다.

하느님께서는 부드러운 분이실까, 아니면 부드럽지 않은 분이실까. 가장 완벽한 부드러움은 하느님 안에서 구현된다. 때로는 모진 모습을 보일 때도 있지만 그 모질게 보이는 부분도 모두 완벽한 부드러움의 한 부분이다. 완고한 인간을 부드러운 인간으로 변화시키기 위한 모짊이기 때문이다.

영성적인 사람은 부드럽다. 만약 어떤 수사님과 수녀님이 부드럽지 않다면 그분은 수련이 부족하신 분이다. 부드러움의 수련이 필요하다. 하느님을 거쳐서 부드러움으로 나 자신이 충만해져야 한다. 만약 내가 부드러운 상태에 있다고 하더라도 하느님의 힘을 받으면 더 완벽한 부드러움을 구현할 수 있다.

부드러움의 수련이 일정 부분 성취하게 되면, 우리는 하느님 뜻을 이루는 데 있어서 좀 더 확고해질 수 있다. 하느님의 힘으로 하기에 더욱 확고해진다. 여기서 확고함은 완고함과는 다른 것이다. 인간에게서 오는 것이 완고함이라면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은 확고함이다. 흔들림 없이 하느님 뜻과의 조화를 위해 굳센 걸음을 걸어갈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다. 이 모든 부드러움과 확고함 등은 모두 우리의 노력으로 습득되는 것이 아니라 부여되는 것이다. 이는 우리의 노고의 결과가 아니라 초월적 사랑의 결과다. 꽃꽂이를 잘하는 것도, 수영을 잘하는 것도, 레지오 마리애 단장 역할을 잘하는 것도, 본당 주임신부 역할을 잘하는 것도, 보좌신부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것도 모두 선물이다.

나를 드러내려 하고, 내가 행복해야 하고, 내가 이름을 드날려야 한다고 느낀다면 진정한 행복의 선물을 받을 수 없다. 어쩌면 우리는 나 자신이 잘되려고 하기 때문에 거저 주어지는 선물을 받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어떤 의사가 확고함과 부드러움의 성량을 가지고 인술을 펼친다고 했을 때, 또 어떤 공무원이 서민들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할 때, 어떤 사제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명예와 존경, 만족감을 뒤로하고 오직 신앙인들의 행복을 위해 투신하는 것은 모두 선물이다. 이러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초월적 사랑을 줄 수 있는 하느님 사랑의 결과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것 자체도 선물이고 하느님 사랑의 결과다. 내가 잘나고 잘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내가 했습니다”라는 말은 모순이다.

반대로 지금 이 글을 읽는 것 자체도 선물이다. 읽을 수 있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를 주신 분이 하느님이시다. 결국, 모든 것이 하느님 것이다.

이런 맥락을 모두 알게 되면 세상이 환하게 보인다. 공명의 실천은 빛으로 드러난다. 공명은 우리를 눈부신 빛으로 만든다. 합치 융화 연민 역량 확고함 부드러움의 삶을 살면 우리의 모습이 환해진다.

그런데도 주위에는 우울한 삶을 살아가는 이들이 많다. 그들의 삶은 환하지 않다. 우중충하고 우울하고, 암울해 보인다. 하루하루 긴장 속에서, 혹은 왠지 모를 허전함 속에서 살아간다. 왜 그럴까. 그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 그 이유가 뭘까.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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