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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진 신부의 세상살이 신앙살이] (204) 때로는 믿음만이 ③

낯선 곳 낯선 땅 … 곁에는 오직 주님과 배우자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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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년 전 결혼식 날, 부부가 꼭 ‘성 야고보 사도 순례길’을 떠나기로 결정하고 알뜰살림으로 여행경비를 마련하고 난 뒤, 막상 긴 여정을 떠나려고 했을 때 생각하지도 못한 일들이 생겨서 인간적인 갈등을 여러 번 겪기도 했다는 이야기를 남편에게 들었습니다.

“출발 직전 연세 드신 부모님이 갑자기 많이 아프시다는 소식을 큰 형으로부터 들었습니다. 그래서 틈만 나면 시골에 몇 번이나 갔다 오고 그랬어요. 큰 형님 내외는 우리와 종교가 다르기에 죄송스러웠어요. 혹시나 무슨 일이 일어날 지 모르는 상황에서 긴 여정을 떠난다는 것이….”

그러자 아내 역시 “우리 애들이 그나마 다 컸다고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엄마로서 돌봐 주어야 할 아이들이라 20일 넘게 집을 비우는 것이 잘하는 짓인가 몇 번이고 고민도 했어요”하고 말했습니다.

남편의 형님도 넓은 마음으로 잘 다녀오라고 동생의 여정 길을 격려해 주었고, 자녀들 역시 ‘우리 엄마, 아빠가 세상에서 제일 멋있다’는 말로 응원해 주었답니다. 그렇게 부부는 긴 여정을 떠났고, 일정을 다 끝낸 후 한국에 잘 돌아왔다고 소식을 전해 왔습니다. 그 후 만날 일이 있었는데 담담하면서 말할 수 없는 평온함이 얼굴에 묻어 있었습니다. ‘잘 다녀오셨어요?’하며 인사를 드렸더니, 자매님이 먼저 말을 꺼냈습니다.

“신부님, 거기서 순례를 시작하는데 많이 놀랐어요. 전세계에서 수많은 사람이 수많은 사연을 가지고 그 길을 걷고 있었는데 걷는 도중에 한국분들도 몇 분 만나곤 했어요. 또 저녁이 되면 거의 대부분 같은, 혹은 가까운 숙소에서 함께 지내는데 국적은 달라도 마음이 통해서 그런지 손짓, 발짓만으로도 충분한 대화가 된다는 사실에 놀랐어요. 순례길에서는 그저 모두가 한마음이 되더라고요.”

이때, 형제님은 다 해진 지도 한 장을 꺼내서 보여주었습니다.

“그런데 신부님, 우리 부부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짓을 했더라고요. 다른 분들은 순례를 위해 수많은 정보와 책자들을 꼼꼼히 준비들 했는데, 우리 부부는 그저 이 간략한 지도 한 장을 가지고 갔거든요. 결국 이번 순례길을 통해 25년 전에 하느님께서 이미 우리 부부를 초대했고, 그분께서 우리의 전체 여정을 짜 주셨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실 우리 부부도 남들처럼 완벽하게 준비하고 갔더라면, 그런 체험은 못했을 거예요. 특히 준비한 전체 일정이 그 두꺼운 책대로 되지 않을 때마다 더 불안하고…, 아마 우리 부부는 많이 다투거나 싸웠을 거예요. 그런데 그저 그분만 믿고 이 지도 한 장을 가지고 그곳에 설치되어 있는 팻말을 따라 걷기만 했어요. 바람이 뒤에서 불 때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걷고 계시는 것 같았고요, 앞에서 불 때는 하느님을 안고 가는 그런 느낌으로 걸을 수 있었어요. 비가 와도 좋았고, 바람이 심하게 불어도 좋았고, 나무가 있어서 좋았고.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내 곁에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한 평생을 함께 살아가는 소중한 배우자가 있어서 가장 좋았어요!”

지도 한 장과 믿음만으로 낯선 땅, 낯선 곳을 다녀온 부부의 평온함 앞에 그냥 고개가 숙여졌습니다. 아무 말도 필요 없었습니다. 아무 말도.


강석진 신부(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3-08-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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