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사목/복음/말씀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38) 하느님 뜻과의 조화 (2)

존재 자체가 하느님의 선물인 ‘나’/ 내 욕심대로 살아가면 보기 흉한 삶/ 주님 뜻 깨닫고 닮아가도록 노력을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나는 선물 꾸러미다. 거저 주어진 선물 덩어리다. ‘나’라는 존재 자체가 선물이고 그 존재를 구성하는 모든 것이 선물이다. 그러니까 감사할 수밖에 없다. 선물을 감사하게 받은 사람은 그 선물을 함부로 하지 않는다. 소중하게 다루고 값지게 사용한다. 마찬가지다. 선물로 주신 ‘나’라는 존재 자체를 값지게 써야 한다. 그 선물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이다. 또 합치, 융화, 연민, 역량, 그리고 앞으로 계속해서 단계적으로 알아볼 개방성, 인정, 초탈, 확고함, 부드러움, 사밀함 등의 인간 마음의 성향들이다. 우리가 공짜로 주어진 이러한 선물들을 감사히 받아들이고 값지게 쓸 때, 모든 인간 성향들이 빛을 발할 수 있다.

우리의 신학 영성 체계는 그동안 이러한 분석 없이 그저 ‘겸손하게 살아라’ ‘성실하게 살아라’ ‘착하게 살아라’ ‘체험하라’ ‘규칙을 지켜라’ 등을 강조한 경향이 있다. 하느님 안에서 주어진 선물을 분석해 내지 못하고 그저 두루뭉술하게 이야기만 해 왔다. 앞으로 이 자리를 통해 이러한 이야기들을 좀 더 체계적으로 해나가게 될 것이다.

어쨌든, 다시 선물에 대해 이야기를 계속해 보자. ‘나’라는 존재를 선물로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느님뿐이다. 세상의 어떤 과학자라도, 박사학위가 100개인 사람이라도 나를 선물할 수 없다. 세상 그 어떤 뛰어난 사람도 손가락 하나 만들지 못한다. 아니 손톱 하나도 만들지 못한다. 하느님의 선물에 저절로 고개를 숙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면 자연히 주신 것을 도로 가져가는 것에 대해서도 의연할 수 있다.

시한부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 중 몇몇은 삶에 대한 미련을 놓지 못하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조금이라도 더 살기 위해 발버둥친다. 그까짓것 조금 더 살아서 뭐 하는가. 인간 존재 자체의 위대함을 알게 되면, 삶이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내일 죽어도 아무렇지도 않다. 오히려 오래 살면 살수록 선물로 주신 고유한 광채를 오히려 죽일 수 있다는 두려움이 생긴다. 나뿐 아니라 이웃의 광채도 죽일 수 있다. 죽음이 다가오면 감사한 마음으로 “주님이 주신 고유한 광채를 제가 깨닫고 있는 그대로의 빛을 발휘하면서 살았습니다. 고맙습니다. 이제는 이 빛을 당신께 옮겨야 될 때가 됐습니다. 저를 받아주소서”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얼마나 숭고한 죽음인가. 그래서 뛰어난 영성가들은 죽음을 ‘복된 죽음’ ‘기다려지는 희망찬 죽음’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아름다운 죽음을 맞기 위해 우리는 진정 공명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이 세계는 형성하는 신적 신비로부터 창조됐다. 세계는 하느님 뜻 안에서 조화롭게 형성되도록 그렇게 창조됐다. 이를 위해 모든 것들이 역동적으로 상호 연결되도록 섭리되어 있다. 이 원리가 하느님 뜻대로 잘 돌아가면 그것이 공명이고, 공명형성이다. 물론 공명형성 말고 다른 형성도 있다. 세상에는 삐뚤어진 형성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일그러진 형성, 찌그러진 형성이 있다. 하느님의 뜻대로 형성되어 가지 않고 엉뚱한 내 욕심으로 형성해 가다보니 기형 형성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보기 흉한 삶이 나타난다.

이 세상에 창조된 모든 것은 공명을 이루도록 창조됐다. 우주만물이 당신의 뜻과 조화를 이루도록 창조됐다. 그러기에 세상 만물은 하느님을 닮았다. 아우구스티누스 성인은 하느님이 어떤 분인가를 증명해 내는 데 있어서 이런 이야기를 한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이 돌은 ‘지금 있음’이라는 그 자체로 신의 모습을 닮고 있다.” 하느님은 ‘있음’이다. 하느님은 존재다. 돌도 지금 존재한다. 꽃도 존재한다. 따라서 돌이나 꽃은 존재한다는 그 자체로 하느님을 닮았다. 하물며 우리 인간은 얼마나 하느님을 닮았겠는가. 따라서 인간은 가장 하느님을 닮도록 노력해야 하고, 공명을 이루도록 애써야한다.

인간은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는 존재다. 다른 모든 피조물들은 있는 자체로 하느님을 닮고 있지만 인간에게는 더 특별한 능력이 있다. 하느님의 뜻이 무엇인가를 깨닫고 더 깊이 있게 하느님을 닮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다. 본성적인 차원에서만 끝나는 게 아니라 조금 더 깊이 있게 닮아 나갈 수 있는 능력을 인간만 가지고 있다. 많이 받았다는 것은 할 일도 많다는 뜻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3-18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5

마르 16장 15절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