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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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2) 하느님 뜻과의 조화 (6)

하느님 원하시는대로 형성해 나가자/ 세상 만물 속에서 내적·영적 의미 찾으며/ 각자에게 주어진 ‘형성의 신비’ 구현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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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피자(逃避者) : 도망하여 몸을 피하는 사람.

- 이방인(異邦人) : 다른 나라에서 온 사람.

나와는 전혀 관련 없는 단어라고 생각할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세속적 출세, 금전적 성공을 꿈꾸며 살아간다면 영적인 차원에서 볼 때 도피자이자 이방인이다. 왜 그럴까? 인간은 본질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영적으로 형성되어 있다. 영적인 차원을 구현해 낼 수 있도록 창조 이전부터 형성되어 있다. 이것이 형성의 신비다. 그럼에도 만약 눈앞에 보이는 이권만 좇아서 살아간다면 그것은 도피자다. 해야 할 것에서 도망해 피하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이 아닌 불공명의 연주자다.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는 이는 조화에 대해 탁월한 감각이 있어야 한다. 우주에는 공명의 힘찬 합주가 울려 퍼지고 있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이러한 조화의 합주를 연주해낼 능력을 안고 태어났다. 하지만 부조화를 연주해내는 이들이 많다. 미지의 궁극적인 것에 둔감해져 있거나, 아예 눈을 감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런 이들은 조화가 아닌 부조화를 가져온다. 겸손 혹은 감사와는 거리가 먼 이기적 삶을 살기에 이웃을 혼란시키고 자존심 상하게 한다. 본인도 그렇지만 이웃과 세상을 비뚤어지게 한다. 도피자가 아닌 함께하는 자로, 이방인이 아닌 선택받은 민족으로 살아야 한다. 하느님의 애인이 되어야 한다.

이를 조금 어려운 말로 표현하면 ‘공명은 형태와 형성의 광채다’. 하느님께서 만들어 놓으신 우주 전체와 모든 창조물에는 신묘하게도 ‘폼’(form)이 있다. 형태가 있고, 꼴이 있고, 모양이 있다. 개구리는 개구리의 꼴, 복숭아는 복숭아의 꼴이 있다. 이 폼(꼴, 모양, 형태)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잘 만들어 가는 것이 형성(포메이션, formation)이다. 폼이 하느님께서 당초 창조하신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형성이고, 창조하신 방향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것이 반형성이다.

모든 창조물과 인간 각자가 주어진 자리에서 ‘형성의 신비’를 구현하는 것, 각자 주어진 꼴을 하느님 원하시는 방향으로 만들어 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의무다. 이것이 삶의 진정한 의미이고, 하느님 섭리의 결정체다. 우리 각자가 갓 태어났을 때의 폼은 어떠했는가. 초등학교 때의 폼은 어떠했고, 지금 나의 폼은 어떠한가. 또 앞으로 20년 후의 폼은 어떠할 것인가. 좋을 수도 있고, 좋지 않을 수도 있다. 나의 폼, 나의 꼴을 잘 만들어야 한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방향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얼굴에 화장품을 바른다고 해서 폼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해서 폼이 좋아지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말하는 폼은 그런 폼이 아니다. 예쁜 얼굴을 보고 폼이 좋다고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니다. 외면도 예뻐야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내면을 가꾸어야 한다. 껍데기 폼도 가꾸어야 하지만 우선적으로 내면의 폼을 가꾸어야 한다.

그런데 이 폼을 가꾸는 것, 즉 형성(포메이션, formation)하기가 어렵다. 왜 그럴까. 이유가 있다. 포메이션을 위해 인포메이션(information, 정보, 지식, 재료)을 묵상해 보자. 인포메이션 중에는 외적인 것과 내적인 것이 있다. 세상의 모든 인포메이션 안에는 내적인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찾아야 한다. 꽃이 피어나는 인포메이션에서 하느님 형성(포메이션)의 신비를 읽을 수 있어야 한다. 비가 올 것이라는 일기예보 인포메이션을 접할 때 우리는 우산을 챙길 수도 있지만, 만물을 생성시키는 하느님 은총의 신비를 묵상할 수 있다. 우산을 챙기는 것은 인포메이션을 외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내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래서 기도와 묵상이 필요한 것이다.

기도가 무엇인가. 세상에 있는 모든 이름과 인포메이션에 영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것이 기도다. ‘개똥이’라는 아이에 대한 인포메이션을 접하고, 그 개똥이의 영적 행복을 위해 고민하는 것이 기도다. 세상 만물에 붙여진 이름 각자의 고유한 광채가 드러나도록 하는 것이 바로 기도다. 예수님으로부터 내면적으로 해석해내는 힘을 받은 베드로는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라 나섰다.

우리도 세상으로부터 주어지는 인포메이션(지식, 정보)에서 포메이션(형성)의 내적·영적인 의미를 읽어 내야 한다. 그럴 때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진다. 인생을 보는 눈이 달라지면 구원과 하느님과의 합치를 갈망하게 된다. 하느님의 뜻과 조화를 이루는 삶을 희망하고 또 살 수 있게 된다.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같은 진리를 알려주기 위한 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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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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