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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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3) 하느님 뜻과의 조화 (7)

인간을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 광채/ 자신의 폼 안에서 형성의 신비 완성시켜 나가며/ 하느님이 주신 능력대로 각자의 광채 드러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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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채가 나야 한다. 으리으리한 광채가 나야 한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우리 안에 빛의 씨앗을 주셨다. 그 빛을 드러내야 한다. 내적으로 드러낼 것이 없으면 광채도 드러나지 않는다. 성당을 아무리 잘 지어도, 신앙인들이 그 성당 안에서 대충대충 산다면 그 성당에는 광채가 나지 않는다. 광채가 나지 않는 성당은 의미가 없다. 성당을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성당에서 신심생활을 잘 닦아서 광채가 나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성전을 아름다운 스테인드글라스 예술품으로 장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신앙인들을 하느님의 신비를 잘 드러내는 성당 작품으로 만드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렇게 하느님의 광채는 그 광채를 받는 인간 개개인을 통해 세상에 드러난다.

문제는 ‘나’다. 나를 세상에서 가장 예쁘고 광채 나는 모습으로 만들어야 한다. ‘나’는 해보다 더 빛나고 달보다 더 은은하다. 해와 달, 하늘과 바다가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아름답게 나를 만들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중심이 잘 잡혀 있어야 한다. 이곳 힐끗, 저곳 힐끗할 필요가 없다. 오직 한곳만 바라보면 된다. 나를 가장 아름답게 만들어 주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느님이시다. 그분의 광채는 눈이 부시다. 그 광채를 받아 나의 광채를 다듬어야 한다. 훌륭한 운동선수가 되기 위해선 훌륭한 코치를 모시는 것이 중요하다. 인생의 진짜 코치에게 착 달라붙어 매달린다면 우리는 언젠가는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영성 선수가 될 수 있다. 하느님은 가짜 코치가 아니다. 진짜 코치다. 오리지널 코치다. 그분의 가르침, 그분의 광채를 우리 각자 안에서 구현해 내야 한다.

하느님은 나의 폼(꼴과 모양, 형태)이 광채 나길 원하신다. 또 포메이션(형성)의 광채 나는 삶을 간절히 원하신다. 우리에게 세상 만물을 통해서 끊임없이 은총을 주시는 이유다. 확실한 계시도 있다. 세상을 보라. 그분으로부터 창조된 세상 만물 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 광채를 내고 있는가. 이는 모든 인간이 세상 만물을 통해 하느님의 광채를 드러내라는 간절한 계시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인간이 동일한 광채를 비추어 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하느님이 인간 각자에게 주시는 능력은 모두 다르다. 시력, 입맛도 각양각색이다. 어떤 이는 멀리 볼 수 있고, 어떤 이는 가까운 곳을 잘 볼 수 있다. 어떤 이는 단맛과 쓴맛에 민감하고, 어떤 이는 신맛에 민감할 수 있다. 폼(형태, 외양, 꼴)이 다른 만큼 하느님께서 주신 능력도 다르다. 모든 사람이 법대에 가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이는 축구선수가 되고, 어떤 이는 디자이너가 된다. 폼이 다른 만큼 포메이션(형성)도 달라진다. 우리는 각자 주어진 형태와 형성을 가지고 광채를 내야 한다. 선생님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을 했으면 그 형성 안에서 광채를 내야 한다. 군인이 되는 방향으로 형성했다면 진정한 군인의 광채를 내야 한다. 예술인은 예술인의 광채를 내야 한다. 이 말은 단순히 각자의 주어진 직업 혹은 섭리에 충실하라는 말이 아니다. 여기서 우리가 드러내야 하는 광채는 하느님의 광채다. 선생님의 폼 안에서 진정한 하느님의 뜻을 실현시키는 방향으로 형성해야 하고, 군인의 폼 안에서 하느님의 뜻을 구현시켜야 한다. 출세도 하느님께서 원하는 형태로, 성공도 하느님께서 원하는 형태를 가지고 형성해 나가야 한다.

본당 공동체 이야기를 해 보자. 본당 신부는 신자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아니다. 수많은 폼(형태, 꼴) 중 하나일 뿐이다. 평신도와 마찬가지고 자신의 폼 안에서 포메이션(형성)의 신비를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나는 개인적으로 밥하는 능력, 치열한 직장생활을 버텨내는 능력이 없다. 우주선을 발사할 능력도, 마당에 채소와 꽃을 잘 가꾸는 능력도 없다. 받은 능력보다는 못 받은 능력이 더 많다. 하느님이 나에게 사제직을 주었기 때문에 이것만 하는 것이다. 높고 낮음을 따지는 것이 무의미하다. 우리 모두는 각자 주어진 폼으로 하느님을 향해 형성의 신비를 완성해 나가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높낮이를 잘못 따지다 보면, 첫째가 꼴찌 된다. 역설과 모순의 법칙이 하느님 안에서 통하는 것은 세상의 이치가 아닌, 진리의 이치를 적용하기 때문이다. 높낮이를 따져서 뭐하겠는가. 하느님이 나에게 형태와 형성을 주신 것만 해도 보통 감사할 일이 아니다. 아니, 내가 태어난 것 자체가 신비고 감사다. 하느님께서 주지 않은 것을 나는 할 수 없다. 그저 타인 안에서 섭리하시는 하느님을 찬미하고, 그 찬미 안에서 타인을 존중하고, 나의 일을 감사히 받아들이면 된다.

이를 위해선 ‘용기’와 ‘결단’이 요청된다. 진리를 깨닫고 주님 안에서 사는 사람은 가진 능력대로, 주신 능력대로 광채를 내겠다는 용기와 결단을 보이는 사람이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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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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