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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4) 하느님 뜻과의 조화 (8)

관상적 차원으로 세상보기/ 논리적·분석적 판단한다고 착각하기 쉬운 현대인들/ 욕심 없애는 노력으로 주님 뜻에 부합된 삶 살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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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이 주신 우리의 폼(형태, 꼴)은 아름답다. 요즘 젊은이들을 보라. 얼마나 폼 나는가. 우리의 폼은 광채 그 자체이신 분을 반영하기 때문에 광채가 난다. 그런데 이런 우리의 폼에 대한 관상을 흐려놓는 것들이 많다.

개인적 차원에서는 돈, 명예, 권력, 이기심, 욕심 등이 그것이다. 사회적 차원으로는 인권 상실의 문제를 들 수 있다. 인권이라는 것이 참 묘하다. 공기와 같아서 참으로 소중하지만 일상적으로는 그 소중함을 느끼지 못하고 무감각할 수 있다. 하지만 인권이 없어질 때 우리는 엄청난 존재의 위기를 겪을 수 있다. 인권의 위기, 정의의 위기, 환경의 위기가 닥치면 우리는 관상을 하기 힘들다. 당장 먹고살기 힘든데, 당장 살 집에서 쫓겨나는데 어떻게 관상을 할 수 있겠는가. 따라서 관상을 위해선 나 자신의 명예욕, 권력욕 등 욕심을 없애는 정화 노력을 해야 하는 것은 물론 주변 상황도 정화시켜야 한다. 만약 정화시키지 못한다면? ‘공명 상실의 결과’ 즉, 하느님 뜻과 조화되는 삶을 살지 못하는 결과로 이어진다.

이렇게 될 때 그 결과는 참담하다. 우선 기도하거나 사랑하는 것이 불가능해 진다. ‘공명’(Consonance, 共鳴, 하느님 뜻과의 조화) 상태를 만들지 못하면 기도도 할 수 없고, 사랑도 할 수 없다. 자살하는 청소년들, 극심한 조울증을 겪는 현대인들이 그 예다. 공명을 상실하면 기도와 사랑이 끼어들 틈이 없어진다.

우리는 삶 안에서 수많은 지식과 정보(인포메이션)를 받아들인다. 주변 상황을 통해서, 그리고 신문과 잡지, 컴퓨터, 텔레비전, 이웃을 통해 수많은 정보를 받아들이는데, 이 모든 정보들이 공명을 이뤄야 한다. 이 모든 세상의 정보들이 하느님 뜻과 조화를 이룰 수 있도록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고 대부분 지식적 차원에서 ‘아는 것’에서 멈춘다. 이성에서 마음으로 옮아가지 않고 지적인 차원에 그치고 있는 것이다. 권력을 가진 사람이 정보가 부족해서 하느님 뜻에 부합되지 않는 삶을 사는가. 세상을 보고 정보를 받아들이는 것, 즉 인포메이션은 포메이션(형성)의 장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모든 정보와 지식을 하느님 뜻 안에서 나 자신의 형성과 이웃의 형성을 위해 사용해야 한다.

그럴 때 모든 것이 달라진다. 인포메이션(지식, 정보)을 이웃을 위해 사용하면 포메이션(형성)이 잘 된다. 눈의 형성이 잘 되고, 코의 형성이 잘 되고, 입의 형성이 잘 된다. 세상의 좋은 지식과 정보를 이웃에게 전하면 눈이 예뻐지고, 입이 예뻐진다. 그 예쁜 입과 눈이 나와 함께 이웃도 예쁘게 만든다. 예쁘게 형성시킨다. 이웃이 아닌 나만을 위해 이기적이거나 경쟁적으로 인포메이션을 사용하면 잘난 척하게 되고, 똑똑한 척, 아는 척 하게 된다. 가진 것이 없는데도 나 자신을 포장하기에 급급하게 된다. 그러면 반형성이 된다.

잘생겼던 얼굴 모양도 일그러지고, 눈도 매서워지고, 입도 비뚤어진다. “먹고살기 위해서 어쩔 수 없어서…”라는 변명이 필요 없다. 이런 얼굴과 눈과 입에는 아무리 좋은 화장품을 써도 소용없다.

사회는 지금 아름다운 형성이 아닌, 추악한 반형성이 만연해 있다. 학연 지연이 그렇고, 끼리끼리 문화, 왕따가 그렇다. 억울한 사람을 양산하는 냉혈한 직장 문화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국 사회는 똘똘 뭉친 것이 아니라, 거친 돌들이 제각기 어설프게 뭉쳐있다. 언제 흩어지고 언제 돌팔매로 변할지 모른다. 각 공동체들은 스스로의 역량을 강화시켜 다른 공동체를 키워주어야 하는데, 끼리끼리 자신들의 파워만 키우기에 급급해 하고 있다. 본당에서도 우리는 나만의 신심단체, 나만의 활동단체를 많이 볼 수 있다. 내 것을 넘어야 한다. 하느님 뜻과의 조화, 즉 공명을 향해서 초월해 가야 한다. 전체가 하나가 되어야 한다. 하나가 전체를 지향해야 한다.

사실 인간은, 특히 현대인들은 높은 교육의 성취 때문에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판단을 하기 쉽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논리적이고 분석적인 판단을 한다고 착각하기 쉽다. 이래서는 진정한 형성과 공명의 신비를 성취해 낼 수 없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것에서 관상적인 차원으로 넘어가는 힘을 길러야 한다.

우리의 자녀들이 어설프게 논리적이고 어설프게 분석적으로 성장하고 있다. 논리적인 사고를 지향하는 것이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수준을 더 높여야 한다. 논리적 차원을 넘어서는 신비적 차원에 대한 인식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세상을 논리적 차원이 아닌 관상적 차원으로 보도록 해야 한다. 세상에 논리적인 것이 다라면 그 세상에는 분열과 갈등, 마찰만 있을 것이다.

세상을 관상적 차원으로 보기! 이를 위해선 진정한 ‘경외’가 필요하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2-0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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