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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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성적 삶으로의 초대Ⅱ] (45) 하느님 뜻과의 조화 (9)

하느님 뜻과 통합된 삶 살자/ 과거 되돌아보며 자신을 세밀하게 점검하고/ 하느님 힘 믿으며 스스로를 재형성해 나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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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맹자(孟子)를 읽다가 참으로 의미심장한 그리스도교 영성적 용어를 발견했다. ‘존심양성’ (存心養性)이 그것이다. “하느님이 태어날 때부터 심어주신 본래의 마음을 잘 보존하고, 하느님이 그 마음속에 심어 주신 본성을 잘 키워 나가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다 보면 하느님 나라에의 참여라는 뜻밖의 선물을 받을 수 있다.

이런 삶을 나는 ‘통합된 삶’이라고 부른다. 오늘은 통합된 삶에 대해 묵상해 보자. 통합된 삶의 반대말은 단편화된 삶, 파편화된 삶이다. 주어진 삶의 상황과 매일 만나는 이웃 안에서 우리의 말과 행위들이 의미 없이 흩어질 때 통합된 삶은 불가능하다. 세계와 인간, 그리고 그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하느님과 통합적으로 교류해야 한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단편적 삶을 이어간다. 나와 만나는 몇몇 사람들, 주어진 몇 가지 상황에 매여 전전긍긍하며 산다.

어린 시절을 기억해 보자. 아기 때 우리는 배가 고프면 울었다. 가지고 싶은 장난감을 소유하지 못했을 때 부모님께 떼를 썼다. 참으로 자신밖에 모르는 욕심 가득한 삶이었다. 이것이 바로 파편화된 삶이고, 단편적인 삶이다. 어른이 된 우리는 배가 고파도 빵 한 덩이를 떼어 이웃에게 나눠줄 관용과 배려,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그래서 하느님 안에서의 통합적 삶으로 전환해야 한다.

나 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사고방식은 교회 안에서도 만연해 있다. 반모임, 지역모임은 물론이고 각 교회 내 단체에서 ‘내 맘대로’ 하려는 사람들이 많다. 하느님이 엄연히 계시고, 그 하느님이 모든 것을 연결해 주시는데 많은 이들이 ‘내 뜻대로’만 하려고 한다. ‘내 탓이오’만 외치지 말고, ‘하느님 뜻대로’를 외쳐야 한다.

파편화된 삶을 이웃과의 만남과, 주어진 상황에서 점검해야 한다. 그리고 하느님을 중심에 두고 나 자신을 세밀하게 점검해서 그 안으로 침잠해 들어가야 한다. 이것이 재통합이고, 재형성 나아가 초월적 형성이다. 과거의 삶의 상황과 사건들을 재해석하면서 현재의 나의 몸과 정신 그리고 마음을 재통합해야 한다. 가정 안에서도 학교 안에서도 직장에서도 친구 관계에서도 그렇다. 우리는 단편화된 삶을 살아왔기에 하느님 뜻에 조화되는 공명적 삶을 살았다고 보기 어렵다. 하느님의 뜻과 조화된 삶, 이것이 바로 관상적 삶이고, 통합된 삶이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지식적, 논리적, 이성적 차원에서 관상과 통합에 접근하려는 모습을 종종 본다. 인간은 육신과 정신, 마음으로 되어 있는데, 많은 이들이 정신적 차원에서 하느님을 만나려고 한다. 물론 정신적 차원의 노력도 훌륭하지만, 신앙인인 우리는 영적 차원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하느님을 갈망하고 그 안에서 영감을 받아야 한다. 이는 지식적 차원으로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신앙인들은 달라야 한다. 일반인들도 아름다운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도 삶을 위해 노력하고 매순간 스스로의 삶을 재점검한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궁극적 깨달음으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적 노력은 한계가 있다. 하느님의 힘을 믿고 받아들여야 지속적으로 스스로를 재형성시켜 나갈 수 있다.

인간은 나약하기에 쉽게 좌절한다. 그리고 과거의 나쁜 습관으로 쉽게 돌아가 버린다. 취미생활, 스포츠 동아리 활동 등은 몸과 정신적인 차원이다. 물론 이 같은 사회적 모임을 통해서도 나 자신의 몸과 정신을 건강하게 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한다. 영적인 단계로 나아가야 한다. 이것이 통합이다. 파편화된 삶이 아닌 신앙 안에서 하느님의 뜻과 통합된 삶을 살아야 한다.

신앙 생활하는데 있어서 육신적 정신적 차원에서 은총 받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영적인 차원까지 포함하는 통합의 은총이다. 통합적 삶을 깨달으면, 통합적 삶을 위해 노력하면 은총이 더 크게 충만하게 다가온다. 이것이 바로 관상을 삶 안에서 실천해 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세상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종종 관상적 현존을 소홀히 하도록 유혹받는다.

하느님의 뜻을 찾아나가는 것이 통합이다. 그런데 이를 논리적이나 기술적으로 한다는 것은 내 뜻대로 하는 것이다. 하느님의 뜻이 중요하다. 나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점검하는 차원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하느님의 뜻을 찾아야 한다. 그래서 더 높은 가치를 구현해 내야 한다.

신앙인들은 신앙을 가지지 않은 사람들 보다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영위할 수 있다. 영적인 차원을 보는 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신앙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정영식 신부 (수원교구 군자본당 주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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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2-0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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