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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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26〉세상 속의 교회 (3)무엇이 교회를 교회답게 할까?

남은 것 아닌 요긴한 것 나누고 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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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발전은 `소유` 아니라 `존재`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데 있다. 이를 위해 교회는 그리스도와 일치해야 하고, 또한 사회와도 일치해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투신이다.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교회의 `남은 것`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잘 것이 없어서 가난으로 고통 받는 이들이 있는데 교회가 하느님께 드리는 경신례(敬神禮)를 위해서 값비싼 장식을 마련한다든가, 화려한 성전(聖殿)을 짓는다든가 하는 일은 신앙이 아니다. 소유의 노예가 된 세상 사람들에게 존재의 복음을 가르쳐 주어야 할 교회가 더 소유하기 위하여 애를 쓴다면 이는 교회의 길을 벗어나는 일이다. 교회의 발전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에 있기 때문이다. 더구나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에서라면 더 말할 나위도 없다"(교황 요한 바오로 2세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

 #하느님 나라의 표지, 교회
 필자가 회칙 「사회적 관심」 31항을 계속해서 소개하는 이유가 있다. 사목현장에서 만나는 교우뿐만 아니라 많은 동료 사제와 수도자가 갖는 교회의 할 일에 대한 인식과 태도 때문이다.

 교회가 해야 할 일과 교회의 신앙, 교회의 길을 `그리스도와 일치`로만 이해하며 이를 경신례로 드러낸다고 믿는 분이 너무 많다. 그럴 경우 교회가 할 일은 당연히 경신례의 테두리에 갇히게 된다.

 사회와 일치를 필수가 아닌 선택쯤으로 이해하는 태도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다. 사회를 인간다운 발전으로 이끄는 교회 투신을 개인 성향쯤으로 치부하거나 때로는 불필요한 간섭 정도로 폄하한다. 교회의 그리스도와 사회와의 일치를 이질적인 것으로 간주하고 병렬 대립시키거나 순서를 매기려 한다. 이 역시 교회의 할 일을 이른바 하느님 사업에 제한한다. 하느님 도구에 불과한(?) 교회가 그 주인이신 하느님을 세상으로부터 격리시키려 하는 셈이다.

 지난 호에 교회의 세 가지 직무, 곧 예언직ㆍ사목직ㆍ사제직을 살펴봤다. 오늘부터는 1990년대부터 교우들에게 너무나 익숙한 나눔과 사귐과 섬김을 따져봐야겠다. 교회는 세상에서 나눔과 섬김과 사귐의 원리로 살아 움직이는 하느님 나라 표지이기 때문이다.

 #사회적 기준의 나눔
 교회 나눔을 성찰할 때 나눔 그 자체도 중요하지만, 누구와 무엇을 나눌 것인가 하는 문제도 놓쳐서는 안 된다. 세상의 나눔은 철저하게 주고받기식이다. 그것을 나쁜 것이라 말할 수는 없다.

 하지만 주고받기식 나눔은 최소한의 질서일 뿐이다. 이를 공정 혹은 정의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최소한의 질서조차 무력화된 무한 자유주의의 시장만능 세상에서, 정의와 공정이 언어유희 소재쯤으로 전락한 우리 사회에서 나눔은 주고받기를 넘어 강자의 수탈 수준으로 치닫는다.

 거저 주는 법이 없고, 이익이 생기지 않는 나눔은 어리석음이며 감상주의적 낭만으로 치부한다. 주는 것보다 더 많은 것을 얻기 위해 철저하게 계산한다. 더구나 대가 없이 퍼주는 것은 절대로 안 된다. 밑 빠진 독에 물 붓는 어리석음만이 아니라 낭비라는 부도덕으로 간주한다.

 줄 것이 없는 사람들은 당연히 받을 것도 없다. 내놓을 것이 없으면 차라리 부자들 식탁에서 떨어지는 빵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해야 한다. 인간의 존엄함이나 인권을 내세워 자기 몫을 주장하는 것은 염치없는 짓이 된다. 생존을 위한 비굴함은 당연하다고 여긴다.

 세상의 이러한 나눔 구조, 아니 거래 구조에서는 사람을 줄 것이 없는 사람과 줄 것이 있는 사람, 받을 것이 없는 사람과 받을 것이 있는 사람으로 구별해 차별한다. 주고받을 것이 많은 사람은 더 많은 것을 갖게 되고, 없는 사람은 그만큼 궁핍해진다.

 물론 주고받을 것이 재물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치와 경제, 문화생활 등 전인적 차원의 참여기회도 포함한다. 이러한 빈익빈 부익부와 불평등 심화는 단순히 경제적 부조리 현상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이익을 취할 모든 분야에서 이익을 취할 능력이 있는 이들 사이의 나눔, 즉 거래와 경쟁만 있을 뿐이다. 회칙은 이를 "소수의 소유가 다수의 존재, 즉 인간됨을 손상시키는 사회 현실"이라고 진단한다.

 #사회적 기준과 다른 교회의 나눔
 교회의 나눔은 다른 것일까. "예로부터 교회는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기 위하여 교회의 `남은 것` 뿐만 아니라 `요긴한 것`을 가지고도 나누었다"는 회칙 내용은 오늘의 교회에도 해당하는 것일까. 우리 사회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은 누구인가. 우리 교회가 남은 것 뿐아니라 요긴한 것까지도 나누고 있는지도 살펴봐야 한다.

 혹시 가장 가난한 이들의 신음을 듣지 않으려 하는 것은 아닌지, 값비싼 장식의 화려한 성전에서 경신례를 거행하는 것만이 교회가 해야 할 일이라고 믿고 싶어 함으로써 그 불편함에서 벗어나려는 것은 아닌지 돌아봐야 한다.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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