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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79> 핵무기와 핵발전은 교회의 길이 아니다(4)

''국책사업'' 에 짓밟힌 소시민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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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핵발전은 시민, 특히 힘없고 약한 이들의 `자유`를 심각하게 제한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서 교회의 길이 될 수 없다. 이 자리에서 교회가 믿는 `사회생활의 근본적 가치` 가운데 하나인 자유를 자세하게 설명할 수는 없다. 다만 상식적으로 쉽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소개한다. 우선 사회교리는 자유를 "모든 인간이 지닌 최상의 존엄성의 표징"(「간추린 사회교리」 199항 참조)이라고 밝힌다.
 
 #인간 존엄함의 무게는 다를 수 없다

 모든 인간이 지녔다는 `존엄성`을 존중한다는 것이 그리 쉽지 않음을 우리는 쉽게 체험한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 같지만, 그렇기 때문에 경계해야 한다. 우리 주변을 돌아보라. "사람이라고 다 같은 사람인 줄 알아" 하는 말들을 들어보았을 것이다.

 대개 두 경우를 설명한다. 하나는 우월감이고 다른 하나는 체념이다. 사람 존엄함의 무게가 다르다는 뜻이다. 문제는 그 존엄함의 무게를 다는 척도가 보편적이 아니라 작위적이라는 데에 있다. 재물 소유의 정도, 사회적 지위, 하다못해 우리의 경우는 그가 사는 동네에 따라, 사람의 존엄함의 무게가 다르다.

 핵발전은 철저하게 생산지의 주민과 생산지와 소비지 사이를 잇는 지역의 주민 존엄성과 자유를 배제하는 구조를 가진다. 절대 위험시설인 핵발전소 지역 주민에게 존엄성의 유보, 더 나아가 자유의 유보를 강제하는 구조라는 뜻이다. 그것도 소비지 주민만의 존엄성과 자유를 위해서 말이다. 이는 소비지 주민의 자유를 "순전히 개인주의적 관점에서 생각한다거나 개인의 자율성을 멋대로 무절제하게 행사"하는 것쯤으로, "관계의 단절과 전적인 자기만족의 성취"쯤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극단적인 사례가 지난 호(77회)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밀양 지역의 주민에게는 아파트 높이의 거대한 송전탑을 받아들이라고 강제하고, 성남시 분당구의 지역 주민에게는 민원을 받아들여 지중화 작업을 마치고 잔치를 벌여주는 식이다.

 둘째로 자유는 "아무리 그럴싸하게 포장된 것이라도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 거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어야 한다"(「간추린 사회교리」 200항). 우리는 `거부할 수 있는 능력`에 대해 일종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것 같다. 특히 국가의 행위, 아니 정부의 행위, 아니 관료들의 공적 업무 행위에 대해 거부한다는 것에 대해서는 더욱 그렇다.
 
 #법은 이성과 양심에 따라 집행돼야

 우리는 `충`과 `효`를 절대적인 덕목으로 삼거나, 혹은 절대적인 덕목으로 받아들이는 데에 길들여졌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길들였을 것이다.) 그러는 가운데 책임과 의무, 곧 국가의 책임과 의무, 정부의 책임과 의무, 관료의 책임과 의무, 특히 시민과 시민사회에 대한 그 공적인 책임과 의무를 따지는 일에는 소극적이 됐다.

 소극적이라기보다는 때로는 불경한 것으로 취급받기도 한다. 그러다 보니, 이른바 `국책사업`이란 이름을 내걸고 밀어붙이는 것이 추진력으로 둔갑하기 일쑤다. 그렇게 포장된 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인지, 그릇된 것인지를 따지는 일은 반정부가 되고 반국가가 돼 버리기도 한다. 말하자면 국가, 정부, 관료의 행위로 포장된 그 많은 공사(公事)들의 부도덕함과 비윤리성을 거부하는 것조차 부정한다.

 핵발전의 경우가 그렇다. 핵발전소와 송전탑 건설, 경주의 방사선 핵폐기물처리장 건설 같은 핵발전 관련 사업의 경우 국책사업이라는 이름으로 그럴싸하게 포장되어 강행되지만, 확고한 법적 테두리 안에서, 공동선과 공공질서가 정한 한계 안에서 모든 경우에 책임 있는 태도로 이뤄져야 하는 자유와는 거리가 멀다.

 예를 들어 `전원(電源)개발촉진법(이하 전촉법)`이라는 것이 있다. 전촉법은 전원 개발설비 부지로 결정되면 강제수용까지 할 수 있게 규정해 놓았다. 게다가 사업의 실시계획만 승인되면 도로법ㆍ하천법ㆍ자연공원법 등 19개 법률에 규정된 인ㆍ허가 사항 등에 대해서도 인ㆍ허가가 난 것으로 보기 때문에 사업을 강행할 수 있도록 보장하고 있다.

 이런 법을 `확고한 법적 테두리`라고 할 수 있을까? 이성과 양심에 반하는 법은 확고한 법이 아니라, 오히려 힘없고 약한 이들에게 가하는 폭력일 뿐이다. 법대로 한다지만 "도덕적으로 그릇된 것은 무엇이든지 거부할 수 있는 능력으로 표현되는 자유"에 가하는 폭력에 불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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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3-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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