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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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호 신부의 생생 사회교리] <3> 강론, 건전한 논란(?)을 기대하며 (상)

하느님과 백성의 거룩한 소통의 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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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선 사목 현장에 있는 사제들에게 사목생활에서 "무엇이 가장 어렵습니까?"하고 물으면 사제 대부분이 "강론을 준비하는 일"이라고 답할 것이다. 물론 필자도 예외는 아니다.

 강론에 대해 교우들이 보이는 반응도 천차만별이다. 사제의 강론에 실망하는 교우도 있는데 "무슨 말인지 이해를 못 하겠다"는 이유부터 "강론 시간에 강론은 하지 않고 정치적인 발언을 해서 싫다"는 대답까지 다양하다.

 강론을 듣기 싫어서 다른 본당을 찾는다거나 성당에 가지 않는다는 교우, 강론하는 도중에 격렬하게 항의하거나 강론 시간에 주보를 정독하는 교우도 있다. 심지어 묵주기도를 바치는 교우도 있다.

 그렇다면 강론이 왜 서로에게 힘들며 같은 강론에 대한 교우들 반응도 천차만별일까? 이는 `강론`이 갖는 성격 때문이다.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

 가톨릭교회 교리서에는 사제 강론이 `말씀 선포의 연장`(1154항)으로,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전례헌장은 `전례주년의 흐름을 통하여 거룩한 기록에 따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 생활의 규범들을 해설`(52항)하는 것으로 성격을 밝힌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사제의 직무와 생활에 관한 교령`을 살펴보면 강론과 관련된 소임을 가장 먼저 다룸으로써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강론으로 겪는 어려움의 배경을 찾기도 한다. 교령은 이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사제들은 주님께 받은 복음의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달하여야 할 의무가 있다(생략).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을 전수하고 교리를 설명하거나, 당대의 문제들을 그리스도의 빛으로 해결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언제나 자신의 지혜가 아닌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모든 사람을 끊임없이 회개와 성덕으로 부르는 것이 사제들의 소임이다."

 그러나 현대 세계의 상황에서 사제들의 설교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듣는 사람들의 마음을 더욱 적절하게 움직이려면 하느님 말씀을 일반적이거나 추상적으로만 설명할 것이 아니라 복음의 영원한 진리를 구체적 생활환경에 적응시켜 설명해야 한다.
 
 #강론은 말씀의 선포인가, 주장을 펼치는 장인가?

 이런 교회 가르침을 바탕으로 `강론`과 관련한 논란(?)을 몇 가지로 정리해 성찰하자.

 사제의 강론은 `말씀 선포의 연장`이다. 미사는 사적 신심 행위가 아니다. 미사는 그리스도께서 인류를 하느님께 봉헌하는 공적이고 거룩한 제사이다.

 이 공적 제사를 위해 그리스도께서 세우신 교회는 해 뜨는 데서부터 해지는 데까지,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실 때까지, 그리스도께서 하셨던 일을 계속할 뿐이다. 사제는 그리스도 이름으로, 교회 이름으로 이 제사를 거행하며 하느님 백성은 자신의 삶을 하느님께 제물로 봉헌함으로써 세상과 이웃, 하느님과의 일치에 참여한다.

 이 미사 가운데 `말씀 전례`가 있는데 이 때 하느님의 백성은 `거룩한 기록` 곧 성경(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그냥 독서가 아니라 선포하시는 하느님 말씀을 온 회중이 한 자리에서 듣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사제도 교우도 그런대로 이견이 없다.

 그러나 강론을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볼 것인지, 아니면 `사제의 발언` 정도로 볼 것인지에 따라 논란이 발생할 수 있다. `말씀 선포의 연장`이라고 믿는다면 사제는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막중한 소임을 수행하는 만큼 마땅히 열성을 다해 준비하고 기도해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이 하느님 말씀을 전하는 그 소임 앞에서 두려워했던 그 두려움으로.

 동시에 교우들도 강론이 마음에 들던 들지 않던 그 강론에 마음과 귀를 열고 하느님 말씀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마치 구약의 예언자들 말씀에 이스라엘 백성이 그러했던 것처럼.

 물론 거짓 예언자도 있었고 예언자의 말씀에 아랑곳하지 않은 지도자와 백성도 있었다.

 #강론, 신앙의 신비 해설

 강론을 사제도 교우도 `말씀 선포의 연장`이 아니라 `사제 개인의 발언` 정도로 여긴다면 사제는 아예 강론을 하지도 말아야겠고 교우도 강론을 들을 이유가 없다.

 미사의 말씀 전례가 사제 개인의 혹은 교우 개인의 사사로운 주장의 각축장이 아니라 하느님과 백성 공동체의 거룩한 소통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강론의 소재 및 주제 선정 문제가 발생한다. 평소 자신이 갖고 있는 가치관과 세계관, 그리고 인간관을 펼치거나 혹은 그에 맞춰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의 신비들과 그리스도인의 생활규범을 해설해야 한다.

 예를 들어 사제가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그 사랑은 변함없으시고, 무한하시고, 절대적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은 차별이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건 부유한 사람이건 똑같이 비를 내리고 햇볕을 비추듯 우리를 향해 있습니다"라는 줄거리의 강론을 했다고 하자.

 이를 받아들이는 회중 사이에는 그다지 논란이 일지 않을 것이다. 있다면 아마 "너무 일반적이고 추상적이다" 혹은 처지에 따라서 "위로가 되었다" 정도쯤일 것이다.

 이렇게 신앙의 신비를 해설하는 데에서는 논란이 적은데 그것은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해설하고 온전하게 이해해서라기보다 `신앙의 신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일 것이다. 누군들 신앙의 신비를 완전하게 인간의 언어와 체험으로 해설하겠는가? 누군들 인간의 이성으로 신앙의 신비를 이해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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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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