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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지적 반항아, 머튼의 극단적 선택

[토머스 머튼의 영성 배우기] 4. 아버지의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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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없는 생활과 아버지의 죽음

어머니의 죽음 후 머튼은 화가인 아버지가 전시회와 관련해 세계 여러 곳을 여행하는 동안 때로는 외조부모와, 때로는 가족과 떨어져 학교 기숙사에서 홀로 지내야 했다. 머튼은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저의 어린 시절에 거의 매달 우리의 삶과 계획이 지속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에 지속적인 재정돈을 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때때로 아버지와 저는 함께 살았고, 때때로 낯선 이들과 살았으며, 가끔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사람들은 우리의 삶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사라져 버렸습니다. 우리는 친구들을 사귀었다가, 또다시 다른 친구들을 만나야 했습니다. 모든 것이 항상 변하고 있었습니다.”

1930년, 머튼이 영국의 오캄학교에 다니던 시절 아버지의 병환 소식을 들었다. 그리고 1931년 1월 어린 머튼의 16살 생일을 며칠 앞두고, 아버지 오웬 머튼은 악성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아버지의 죽음 후 그는 이것이 그에게 얼마나 절망을 가져왔는지를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저는 집 없이, 가족도 없이, 나라도 없이, 아버지도 없이, 확실한 친구들도 없이, 어떤 내면의 평화나 확신 혹은 빛이나 저 자신에 대한 이해조차 없이 그리고 하느님도 없이, 천국도 없이, 은총이나 다른 어떤 것도 없는 사방이 저의 외로움을 에워싸고 있는 이루 셀 수 없는 이런 모든 요소와 함께 어둡고 불행한 방에 앉아 있었습니다.”

사춘기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머튼에게 아버지의 죽음은 하늘이 무너질 만큼의 충격과 절망이었다. 그는 모든 것을 잃은 듯 좌절에 빠졌고 좀처럼 헤어나오지를 못했다. 또한, 모든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신앙을 부정했다.

아버지의 이른 죽음은 심리적, 감정적 그리고 종교적 공허함을 가져다 주었다. 칼 융(Carl Jung)의 심리학 관점에 따르자면 그의 어머니의 죽음은 ‘의식의 중심인 에고(ego)와 무의식의 중심인 자아(self) 사이’의 여성적 중개자로서의 역할을 하는 여성적 아니마(anima)의 특별한 기능을 상실하게 하는 원인이 되었을 수 있다. 거기에다 아버지의 죽음은 무의식 안에 고독을 찾고 세상을 거부하는 그림자의 원형(the shadow archetype)을 형성하게 했을 수도 있다.



외로운 지적 반항아

아버지의 죽음 후 머튼은 절망적이고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고, 이는 그의 사춘기와 청년 시절 전체에 지속적인 문제를 일으키게 했다. 그는 자포자기에 빠졌으며 ‘지적인 반항아’와 무절제한 사람이 되었다. 그는 ‘영적으로 죽은 이’였으며, 여기에는 하느님이나 종교를 위한 어떤 자리도 없었다. 예를 들어 1931년 머튼이 16살이 되었을 때, 그는 오캄학교의 소성당에서 사도신경을 바치는 동안 오만함에 가득 차 고의로 입술을 굳게 닫은 채 서 있었다. 그리고 자기 자신만의 신경을 고백하고 있었다. “나는 아무것도 믿지 않는다.” 머튼 학자인 윌리엄 샤논(William Shannon)은 당시의 머튼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의 동시대인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목표도 없고 도덕적 관념도 없으며 믿음이 부족한 바다를 표류하고 있었다.”

머튼은 학창 시절 동안 깊은 외로움을 체험하였다. 그가 학급 동료들에게 외설적인 말들로 조롱을 당했을 때, “저는 삶에서 처음으로 적막함과 공허감과 버려짐의 고통을 알게 되었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다. 이러한 외로움의 감정은 그가 1941년에 겟세마니 수도원에 입회하였을 때에도 수반되었다. 1941년 11월 24일, 그는 “망명자의 감각은 출혈처럼 저의 내면에 피를 흘립니다. 이것은 죄의식이든, 외로움이든 혹은 저 자신의 부족함이든, 영적 건조함이든 늘 같은 상처입니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겟세마니의 새로운 영적 외로움 안에서, 내적 고독을 통해 그의 모든 외로움이 정화되기 시작했다. 성숙해진 머튼은 “저의 우울함과 절망의 순간들은 쇄신과 새로운 시작으로 모습을 드러내고 있습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 모니카 퍼르롱(Monica Furlong)은 자신의 저서 「머튼 전기(Merton: A Biography)」에서 “영국의 캠브리지 (Cambridge)에서 그가 19살이 되었을 때, 머튼은 죄의식으로 몹시 고통스러워 했고, 속죄의 삶을 살아야 한다고 확신했으며, 그래서 이러한 결심이 트라피스트 수도원에 입회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주장한다. 방탕한 삶을 통해 오히려 더 깊은 하느님 체험을 한 머튼은 자신의 변화를 회고하며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우리의) 부족함과 결점에 대한 이해 안에서 우리 자신을 잃어버리는 것을 배우는 것은 우리가 진정한 관상가가 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다.”

요컨대, 안정된 가정이 없었던 어린 시절과 부모를 여의고 외로움과 절망 속에 지낸 방탕한 삶이 오히려 머튼에게 수도원이라는 안정된 집을 찾게 하고, 더 깊은 고독 속에서 속죄와 보속의 삶을 택하게 하는 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 박재찬 신부(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 부산 분도 명상의 집 책임) 젊은 시절의 토마스 머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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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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