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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전쟁 포로가 된 프란치스코, 기사를 꿈꾸다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의 인격 그리고 프란치스칸 영성] 3. 역사·시대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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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시시 성의 망루 로카 마죠레에서 내려다 본 아시시와 움브리아 평원.



프란치스코의 영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당시의 역사와 시대적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간략하게 비트리의 야고보의 증언을 나누었긴 했지만 조금 더 자세하게 그 당시의 역사-시대적 배경을 살펴보겠다.



아시시

아시시는 아직도 전형적인 중세 도시로 제시된다. 이곳은 이탈리아의 중부 내륙에 위치한 움브리아 계곡 위에 솟아올라 있는 곳이다. 이곳은 비교적 작은 지역으로서 그 넓이가 8456㎢밖에 되지 않는다. 이곳은 또한 이탈리아 반도의 중앙 아펜닌노 지역에 위치하며 산들과 언덕들 그리고 삼림으로 우거진 것이 특징이다. 이 지역의 약 6만이 평원일 뿐이다. 아시시는 해발 424m에 자리 잡고 있으며, 이 평원 중 하나를 내려다보고 있는 곳이지만, 그 위로는 해발 1294m의 수바시오 산이 솟아올라 있다. 이 산은 둥근 지붕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삼림으로 가득 차 있다. 아시시는 오늘날도 많은 인구가 있지는 않지만 12~13세기에는 훨씬 더 작은 도시였다.



역사적 배경

중세기의 세계는 양대 권력을 주위로 전개되었다. 한 편에는 신성한 로마의 황제가 있었고, 다른 한 편에는 교황이 있었다. 이 대단한 인물들은 양편에서 버티고 서 있었는데, 프레데릭 바르바로사 황제와 인노첸시오 3세(재위 1198~1216년) 교황이 대표적 인물이다. 이 시대는 거룩함과 속됨의 두 진영에 의해 지배되었던 세상이었지만 이 둘은 서로를 대항해 싸움하는 것으로 끝을 맺는 일이 종종 있을 만큼 이 두 진영 사이의 구별점은 아주 미묘했다. 정권과 종교는 똑같이 권력을 휘두르곤 하였다. 이 시기는 성지 회복을 위한 십자군 원정 시대였는데, 성지는 당시 신앙과 정치적인 야망이 둘 다 활발하게 그 역할을 담당했던 곳이다.

봉건 영주들은 아직도 많은 도시에서 정치적인 배경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아시시도 예외는 아니었다. 물론 오늘날 우리가 보는 그 성곽은 12세기에 거기에 서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로카 마죠레(Rocca Maggiore)라 불리던 봉건 성곽은 오늘날도 그 도시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귀족층은 아직도 지방 업무들에서 상당한 정치적 영향권을 행사하였다. 그러나 12세기 말쯤에 가서는 새로운 계급, 즉 중간 계급이 사회에서 부상하게 되는데, 이 계급은 주로 사업을 하는 사람들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아시시와 같은 작은 도시에서도 귀족들이었던 ‘마요레스(majores)’ 혹은 ‘보니 호미네스(boni homines-선한 사람들)’들과 상인들이었던 ‘미노레스(minores)’ 혹은 ‘호미네스 포풀리(homines populi-대중)’의 구분이 분명하였다. 후자의 사람들인 미노레스들은 경제적인 힘을 이용하여 당시 귀족들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그들의 목적은 구시대의 봉건 체제를 뒤엎고 ‘코무네(Commune-자치 행정부)’라고 불리었던 좀 더 민주적 형태의 정부로 바꾸는 것이었다.



프란치스코와 클라라


프란치스코는 사업상 프랑스를 자주 왕래하던 부유한 상인 피에트로 디 베르나르도네(Pietro di Bernardone)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실 피에트로는 프로방스 지방 출신인 부인 피카(Pica)가 프란치스코를 낳던 때에도 여행 중이었다. 피에트로는 자신이 여행에서 돌아왔을 때 그 아기가 산 루피노 대성당에서 세례를 받고 조반니(Giovanni, 요한)라는 이름을 받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피에트로는 그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아들의 이름을 ‘프란치스코(작은 프랑스 사람)’로 바꾸었다.

산 루피노 대성당이 내려다보이는 아시시 위쪽 어느 귀족 집안에서 약 11년 후인 1193년(혹은 1194년)에 또 다른 여자아이 클라라가 태어난다. 그의 부모는 파바로네 디 오페르두치오(Favarone di Offreduccio)와 오르톨라나(Ortolana)였다. 클라라는 마요레스 계급에 속했고, 프란치스코는 미노레스 계급에 속했다.



시대적 배경


아시시 내에서의 긴장은 대략 1198년경부터 시작되었다. 그 해에 인노첸시오 3세 교황이 선출되었는데, 그는 자신이 대단한 정치가로 인정받고자 했고, 세상적인 일에서조차도 교회의 지상권을 주장하였다. 그해 봄, 황제의 이름으로 로카 성을 관리하던 우르슬리겐(Urslingen)의 콘라드 백작이 인노첸시오 3세 교황에게 스플레토에 있는 공작령을 양도하기 위해 스플레토로 떠났다. 이때, 아시시의 시민들은 그가 없는 틈을 타 로카 성을 점령하고 완전히 파괴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 당시 프란치스코는 16세쯤 되었을 것이다. 그는 분명히 아시시가 자유로운 자치 행정부로서 독립을 얻어내고자 했던 이 사건에 참여했을 것이다. 시민과 귀족 사이의 시민전쟁이 불가피하게 일어나게 된 것이다. 클라라의 가족은 아시시보다 더 크고 강한 이웃 도시인 페루지아로 피신했다가 아마도 1203년경 아시시로 되돌아왔을 것이다. 바로 그해가 아시시의 마요레스와 미노레스 간의 평화조약이 맺어진 해이다.

1202년 페루지아로 피난을 갔던 아시시의 귀족들은 아시시의 시민들과 마주치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콜레스트라다(Collestrada) 전투에 참전하였는데, 이 전투에서 아시시의 군인들은 포로가 되어 감옥에 갇히게 되었고, 프란치스코도 1년간을 감옥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그는 운이 좋게도 부자인 아버지의 보석금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감옥생활을 통해 그의 건강은 매우 약해졌고, 1204년에는 거의 1년간을 병상에서 지내게 되었다.

프란치스코는 몸의 기운을 얻게 되자, 더 높은 이상을 갖기 시작했다. 이번에 그는 기사가 되고자 하는 꿈을 갖고 있었다. 그 당시 그의 나이는 기사단에 들 수 있는 나이였다. 사실 그 당시 새롭게 생겨난 길을 따라 알프스 산맥을 넘어 이탈리아 반도로 건너오는 음유시인들은 기사도 정신을 노래하곤 하였다. 십자군 원정에 참전하는 명성과 더불어서 기사도의 낭만은 많은 젊은이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프란치스코도 예외가 아니었다. 1204년 그는 제4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할 목적으로 남부 이탈리아 풀리에(Puglie)로 출정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그는 브린네의 월터의 군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그의 이 모험에 찬 출정은 단명이었다. 그다음 날, 스플레토에서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던 밤이 지나자(전기 작가들은 어떤 환시와 꿈에 대해서 말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뒤에 조금 더 자세하게 다루겠다) 그는 아시시로 되돌아갔다.

호명환 신부(작은형제회)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20-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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