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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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연중 제30주일 -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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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잔치

지난겨울, 베를린에서 본 어느 자매님의 고희연은 감동이었습니다. 자매님은 어려웠던 시절 간호사로 독일에 오셨습니다. 짧은 어학과정을 거치고 병동에 투입된 파독 간호사들의 수고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가녀린 몸으로 육중한 체구의 독일 환자들을 돌보느라 파김치가 되도록 애쓰던 기억, 그러다 체력이 달려 닭백숙이라도 해 먹으려는데 독일어로 닭이 뭔지를 몰라서 달걀을 들고 가서 얘 엄마를 달라고 했다던 에피소드, 어떻게든 아끼고 모아서 고향 부모님께 논밭을 사드리고 동생들 공부시키고 시집·장가보냈던 이야기들…. 듣다 보면 함께 울고 웃게 되는 사연들이 한아름입니다.

고희연의 주인공인 자매님도 수고 끝에 이제는 은퇴생활을 즐기며 성실히 본당에서 봉사하는 분이셨습니다. 그런 어머니께 고희연을 해드리겠다고 세 아들이 계획을 세웠는데, 정작 주인공이 극구 사양하니 아들들이 꾀를 냈습니다. 성당 강당에 깜짝 파티를 준비해 놓고 어머니를 납치하다시피 모셔왔지요. 가족과 친지들이 각자 집에서 정성스레 준비해온 김밥이며 잡채며 요리로 상을 채운 가운데, 세 아들은 어머니를 위해서 노래를 하고 시를 써서 읽었습니다. 어린 손녀가 비뚤비뚤 손으로 그려 만든 축하 카드를 받으며 환하게 웃는 자매님의 모습은 행복이 무엇인지를 보여주는 교과서 같았습니다.

그렇게 아름다운 잔치 다음 날, 어김없이 봉사하러 오신 자매님께 여쭤 보았습니다. “자매님, 어제 잔치는 너무도 따뜻하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그 좋은 잔치를 왜 안 하겠다고 고집 부리셨어요?” 자매님이 대답하셨습니다. “신부님, 저는 하느님 은총으로 이렇게 가정을 꾸렸고 애들도 잘 커서 행복하게 지내지만, 같이 고생하던 언니들, 친구들 가운데는 그런 복을 못 누리는 분들도 계셔요. 그분들 마음 아플까봐….” 그렇게 말꼬리를 흐리시는 자매님 앞에서 저도 말을 잊었습니다. 나는 누리지만, 또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지만, 누리지 못하는 분들 속사정을 헤아리며 자제하고 삼가는 마음 앞에 무슨 말이 더 필요할까요.

너희도 이방인이었다

오늘 첫째 독서는 하느님께서 모세를 시켜 이스라엘 백성들을 종살이에서 이끌어내시고 십계명을 주시는 대목(탈출기 20장)에 이어지는 법전의 일부입니다. 20장에서 23장까지 이어지는 이 법전 안에는 하느님 백성의 생활을 규율하는 다양한 규정이 등장하는데, 규정 전체를 관통하는 뜻은 네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를 잊지 말고 다른 사람들이 고통을 안 겪도록 돌보라는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단지 개구리 올챙잇적 잊지 말라는 가르침 이상의 의미를 품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노예생활에서 자유인으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남다른 능력을 가졌거나 강대한 국가를 세웠기 때문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한 사람 한 사람을 돌보시는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자비 덕이었지요.

그래서 가장 약한 이들까지 빠짐없이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돌봄과 인도를 체험한 사람은 그 사랑 때문에 나와 엮일 것이 없는 이방인들, 살기 위해서 누군가에게 의지해야만 하는 과부와 고아들, 가난한 이들의 처지를 외면할 수 없습니다. 오늘 내가 누리는 것이 내 힘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하느님 덕분에 얻은 것임을 기억하는 사람은, 무엇보다 그 사랑을 전해주고 물려주는 데 힘을 다할 것입니다.

우리는 무엇을 기억하고 전하는가

내가 겪은 고통을 기억하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시련의 경험은 잊고 싶어도 잊기 어려운 것이니까요. 그 고통의 기억 속에 ‘나는 고생했지만 내 자식만큼은 고생 안 시키겠다’는 마음이 우리 사회의 외형적 성장에 큰 동력이 되었다는 점은 분명해 보입니다. 끼니 걱정에 시달리거나, 돈이 없어서 공부할 기회를 놓치거나, 일만 하느라 옆도 돌아보지 못했던 어려움을 미래 세대가 겪지 않도록 애쓴 결과, 오늘의 한국사회는 물질적인 면에서 전례 없는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십리 길을 걸어가던 세대가 값비싼 자동차로 막히는 거리를 물려주고, 끼니 걱정하던 동네를 미식가의 천국으로 만들어 준 것과는 별개로, 정작 중요한 것, 그러니까 사랑 그 자체를 기억하고 전해주는 데는 소홀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하여 우리 사회는 원하던 풍요는 얻었으되 이웃을 여전히 경계와 경쟁의 대상으로 보는 마음의 빈곤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내가 거두고 이룬 것이 결코 나만의 것이 아니라 하느님과 이웃에게 힘입은 것이라는 점을 놓치기 때문에, 내 성공의 결실을 독점하고 남들이 넘보지 못하게 하겠다는 못난 이기심을 버리지 못합니다. 학벌 사회의 폐해를 뼛속 깊이 체험하고 자란 사람들이 입시 경쟁의 광풍을 잦아들게 하는 대신, 더 지독한 경쟁의 프레임을 강요하는 학부모가 된 것도 그런 까닭이겠지요. 요컨대 고통의 기억, 시련의 기억만 남은 사람은 그 자신부터 고통의 기억을 넘어서지 못할 뿐 아니라 세상을 온통 경쟁자와 잠재적인 적으로 가득 찬 전쟁터로 인식합니다. 내 사람과 남들이라는 이분법에 갇혀서 남들이 도전할 수 없는 나만의 성벽을 쌓아올리는 일에 골몰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

오늘 복음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 시대에 자신들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저잣거리의 보통 사람들은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한 삶을 구가하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들에게서 나와 남 사이에 구별의 벽을 세우지 않고서는 못 견디는 메마르고 빈한한 마음을 보셨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네 마음을 다하고 네 목숨을 다하고 네 정신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또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근본을 짚어주십니다.
그런 맥락에서 사랑의 계명은 의무이기 전에, 우리가 시련의 고통만 남기고 사랑의 기억을 증발시켜 버린 초라한 영혼의 소유자가 아닌지 돌아보라는 말씀 같습니다. 우리가 남기고 전해야 할 것은 고통의 기억이 아니라 사랑의 기억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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