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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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씀묵상]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성서 주간 -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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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호소, 그리스도왕 대축일

전간기(Interwar period·1918~1939)는 제1차 세계대전과 2차 세계대전 사이를 말합니다. 이 기간 인류는 나치즘과 파시즘 같은 극단적인 정치체제의 출현과 1910년대부터 불어 닥친 혁명의 후폭풍을 목격합니다. 국가와 민족 같은 큰 명분을 위한다며 제각기 목소리를 높이고, 사람들이 겪는 고난이 저 나라, 저 민족, 저 집단 때문이라며 혐오와 배제의 손가락질을 일삼던 시기였습니다. 제1차 세계대전은 끝났지만, 그렇게 갈라진 사람들과 민족들, 국가들 사이에 자라나는 적대감과 폭력은 또 다른 전쟁을 예고하고 있었지요.

바로 그때 선출된 비오 11세 교황은 ‘그리스도의 왕국 안에서 그리스도의 평화’를 모토로 삼고 1925년 ‘그리스도왕 대축일’을 제정합니다. 세상의 권력들이 상대를 힘으로 눌러야만 평화가 온다고 부추기고, 저 사람과 저 집단을 무너뜨려야 우리가 산다며 전의를 불태울 때, 참 평화의 길은 그리스도께 있다고 설득하고 호소하신 것이었습니다. 세상의 권력은 결코 영원하지 않고, 모든 이들을 품어 안을 수도 없습니다.

강생하신 하느님의 말씀, 그리스도의 다스림만이 모든 이들을 평화로 이끕니다. 그런 맥락에서 오늘 온 누리의 임금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왕 대축일에 읽는 하느님 말씀은 그분의 왕권이 어떤 것인지 알려줍니다.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시는 주님

첫째 독서에서 에제키엘 예언자는 주님을 공정으로 양 떼를 먹이시는 분이라고 선포합니다. “캄캄한 구름의 날에, 흩어진 그 모든 곳”(에제 34,12)은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에서 가장 비극적인 한 시대를 살았던 에제키엘의 체험을 반영합니다. 하느님 백성이 분열과 우상숭배로 헤매다가 바빌론 제국에 패망하고 유배되는 역사 속에서, 예언자는 그 모든 고통에도 불구하고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을 돌보신다고 먼저 희망을 전합니다.

동시에 예언자는 유배 생활의 아픔을 야기한 백성의 잘못을 날카롭게 지적합니다. ‘부러진 양’과 ‘아픈 것’(16절)을 아랑곳하지 않았던 기름지고 힘센 양은 주님께서 없애버리실 것입니다. 내 배를 불리자고 남의 등을 후려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마치 힘센 자의 당연한 권리인 양 처신하는 이들은 결국 하느님 앞에서 그 옳고 그름이 가려지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잃어버린 양, 흩어진 양의 처지로 고통받는 이들이 기댈 곳은 자신들이 힘을 가지면 평화가 온다고 주장하는 세상의 권력과 세력들이 아닙니다. “푸른 풀밭에 나를 쉬게” 하시고 “잔잔한 물가로 나를 이끄시어, 내 영혼에 생기 돋우어 주시고” “바른길로 이끌어” 주시는 주님의 이름(화답송)이 희망입니다.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시는 주님

이어서 둘째 독서도 주님의 왕권을 선포합니다. 그분은 “죽은 이들의 맏물”(1코린 15,20)이십니다. 모든 사람은 죽습니다. 죽음은 지상 생애의 마지막이요, 우리가 생전에 쌓아놓았던 그 모든 것으로부터 단절되는 절대적인 실패의 순간입니다. “모든 권세와 모든 권력과 권능”(24절)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도리가 없지요.

그 절대적인 좌절과 실패의 순간을 예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 죽음으로 온전히 겪으셨고, 당신의 부활로 이겨내셨습니다. 실패하고 무너져서 나락까지 떨어지는 최악의 순간이 죽음이라면, 예수께서는 그 죽음마저 이겨내심으로써 세상에 이겨내지 못할 고통은 없다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죽음마저 함께하시는 그리스도라면, 어떤 이의 어떤 고통이라도 함께하지 않으실 리 없습니다. 그분은 모든 이에게 모든 것이 되시는 분입니다.

심판하시는 주님

다음으로 복음은 그리스도 왕께서 주재하시는 주님의 심판을 알립니다. “모든 민족들이 사람의 아들 앞으로 모일 터인데, 그는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이 그들을 가를 것이다.”(마태 25,32) 이스라엘 사람들은 양과 염소를 낮 동안 함께 키우다가 밤에는 갈라놓았습니다. 일교차가 심한 이스라엘 환경에서 추위에 견디는 능력이 확연히 차이나는 두 동물을 함께 재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염소와 양의 생태가 정반대여서 함께 밤을 보낼 수 없는 것처럼, 한 분이신 주님 아래 있는 사람들 가운데도 주님의 나라에 함께할 수 없는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먼저 “아버지께 복을 받은 이”(34절)는 가장 작은 이들도 자기 형제로 맞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굶주린 이들, 목마른 이들, 나그네들, 헐벗은 이들, 병든 이들, 감옥에 갇힌 이들을 남으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다른 이의 고통을 무심하게 흘리지 않고 형제애의 손을 내밀어 주었습니다. 그들이 약한 이들을 한 형제로 맞아들인 것은, 모든 이의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것이었습니다. 나와 남의 구별 없이 아픔이 있는 곳에 함께했던 이들이라면, “세상 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된 나라”(34절), “모든 것 안에서 모든 것이 되실”(1코린 15,18) 분의 나라를 차지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반면 주님! 주님! 하면서도 작은 이들을 형제로 여기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함께할 수 없습니다. 심판하시는 주님이 잔인하거나 차별하시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들이 스스로 형제임을 부인한 사람들과 어떻게 한 자리에 머물 수 있겠습니까?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가르듯, 심판자이신 주님은 당신의 양들과 함께하기를 거부하는 염소들을 가려내실 것입니다.

이렇듯 영원한 생명과 벌을 가르시는 최종 심판자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인간이 스스로 무리지어 편을 가르고 심판하는 것은 심판하시는 주님의 자리에 자신을 올려놓는 것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고 또 해야 할 일은 짐짓 심판자 흉내를 내면서 나와 남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이의 모든 것이 되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작은 이들과 함께하는 것입니다.


박용욱 미카엘 신부
대구대교구 사목연구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3-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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