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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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건축의 지평을 넓힌 김수근

[백형찬의 가톨릭 예술가 이야기] (33) 김수근 바오로 (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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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로렌조

서울 불광동성당, 마산 양덕성당, 서울 경동교회, 자유센터, 타워 호텔, 세운상가, 잠실 올림픽 경기장(주경기장, 자전거 경기장, 체조 경기장, 수영 경기장), 샘터 사옥, 공간 사옥, 동숭동 아르코 예술극장, 아르코 미술관, 서울대 예술대, KIST 본관, 문화방송 사옥, 한국일보 사옥, 인천 상륙작전 기념관, 서울 지하철 경복궁역, 한계령 휴게소, 국립부여박물관, 국립청주박물관, 국립진주박물관, 주미 대한민국 대사관저, 국립과학관, 경찰청, 서울지방법원 종합청사, 강원 어린이 회관, 구미 문화예술회관, 워커힐 더글라스 호텔, 워커힐 호텔 힐탑바, 라마다 르네상스 호텔, 벽산 빌딩, 창암장 등.

이렇게 유명한 건축물을 설계한 사람이 김수근(바오로, 金壽根, 1931-1986)이다.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은 그를 ‘한국의 로렌조’라고 했다. 로렌조 데 메디치는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티첼리 같은 르네상스 시대의 예술가를 후원해 인류문화예술을 꽃피게 한 사람이다. 김수근은 한국 현대건축의 아이콘으로 ‘세계 현대 건축가 101인’에 선정되었다.


한옥집과 건축가의 꿈

김수근은 함경북도 청진에서 태어났다. 여덟 살 때 서울로 왔다. 어린 시절을 오롯이 북촌에서 보냈다. 수많은 골목과 기와집이 있는 북촌은 그에게 풍부한 상상력과 호기심을 불러일으켰다. 북촌은 그에게 ‘마음의 고향’이었다. 그래서 북촌은 그의 삶과 예술세계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부친은 사업으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래서 김수근은 비교적 넉넉한 환경에서 자랐다. 어렸을 때 찍은 한 장의 사진이 있다. 한복을 단정히 입은 어머니가 소파에 앉아 공부하는 아들의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는 사진이다. 책장은 양장본 책들로 가득하고, 책장 옆에는 대형 스피커가 놓여있다. 김수근은 ‘집이란 어머니가 계시는 곳’이며 ‘나의 집은 어머니’라고 할 정도로 어머니를 가장 소중하게 생각했다.

해방 이듬해에 중학생이던 김수근은 덕수궁에 관광 나온 한 미군 청년을 만났다. 그에게 영어를 배우려고 그를 가회동 한옥집으로 초대했다. 그는 대학에서 건축을 전공했다. 김수근에게 건축가에 대해 많은 것을 이야기해 주었다. 건축가가 되려면 독서도 많이 하고, 음악도 많이 들어야 하고, 그림도 그릴 줄 알아야 하며, 여행도 많이 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건축가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 말을 들은 김수근은 ‘미국의 대통령보다도 중요한 사람이냐?’고 물었다. 그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김수근은 건축가가 되기로 마음을 굳혔다. 고등학교에 진학해서 합창반과 문예반에서 활동했고, 사진도 열심히 찍으러 다녔다. 고등학교 시절 그의 별명은 ‘베토벤’이었다. 음악에 대해 해박했기 때문이었다.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대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그런데 그해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서울대는 부산으로 이전했다. 김수근은 건축학을 제대로 공부하고 싶었다. 그래서 몰래 배를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다. 여비는 아버지의 악어가죽 가방을 팔아 마련했다. 어머니에게 밀항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여권도 없이 일본에 도착해 불안한 나날을 보냈다. 동네 아이들에게 영어와 수학을 가르치며 어렵게 생활했다. 그러면서도 열심히 공부해 도쿄예술대학 건축과에 합격했다. 재학 중에는 시간 나는 대로 전시와 공연을 구경하러 다녔다. 그러한 경험은 후에 커다란 자산이 되었다. 도쿄대 대학원을 졸업하고는 한국인 유학생들과 함께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설계 공모에 지원했다. 우리나라 전통 사찰의 건축 양식(높은 석탑과 낮은 사찰)을 응용한 설계안을 제출했는데 놀랍게도 ‘당선’되었다. 그런데 5ㆍ16군사혁명이 일어나 무산되고 말았다.

 
서울 가회동 집에서 어머니와 함께 한 소년 김수근.출처=「건축가 김수근 공간을 디자인하다」


워커힐 힐탑바, 세운상가, 박물관 등

김수근은 자신의 건축설계사무소를 차리고 본격적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워커힐 호텔 안에 지은 힐탑바를 노출콘크리트 방식으로 지었다. 마치 피라미드를 거꾸로 세워놓은 것 같았다. 힐탑바에는 김수근의 젊은 혈기와 패기가 담겨 있다. 어떤 건축가의 말대로 힐탑바는 그 당시 ‘김수근의 자화상’이었다.

그 시기에 남산의 자유센터와 타워 호텔, 그리고 세운상가도 김수근의 설계로 만들었다. 세운상가는 종묘부터 남산 기슭까지 길게 이어지는 건축물로 낮은 층에는 차도와 상가를 배치했고, 높은 층에는 거주지와 인도를 배치했다. 공중에 인도를 배치하는 것은 매우 특이한 건축방식이었다. 세운상가는 국내 최초의 주상복합아파트가 되었고, 국내 최대 전자 상가가 되었다.

김수근은 여의도 도시계획에도 관여했다. 당시 여의도는 허허벌판 모래섬이었다. 그곳에 국회의사당, 업무 지구, 상업 지구, 주거 지구를 배치했다. 그러면서 세운상가처럼 건물과 건물을 이어주는 공중 다리도 설치하려 했다. 그런데 여의도가 실제로 개발되면서(특히 대통령 지시로 5ㆍ16광장이 들어서면서) 김수근이 생각했던 설계는 대폭 바뀌고 말았다.

그다음으로 설계한 것은 국립부여박물관이었다. 완공을 앞둔 어느 날, 일간 신문에 박물관이 일본식으로 건축되었다는 기사가 크게 보도되었다. 연일 일본 신사(神社)를 닮았다는 비판이 쏟아졌다. 일본에 대한 국민적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때였다. 이에 대해 김수근은 박물관은 우리나라 전통 토기의 선을 지붕에 응용한 독창적인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비판은 그치지 않았다. 김수근은 거듭해서 자기의 입장을 밝혔다. “건축가는 그의 작품에서 도망칠 수 없다. 부여박물관은 두고두고 내가 죽은 다음에도 산 증거로 남아 있을 것이다. 그것이 신사의 표절이면 나는 반민족적 도둑의 죄를 끝까지 고발당하게 될 것이요, 나의 창작이면 지금 나를 규탄하고 있는 ‘소박한 비판’을 ‘에피소드’로 간직하게 될 것이다.”(‘공간’ 1967년 10월호)

김수근은 소모적인 논쟁에서 뒤로 물러섰다. 그러고는 한국문화에 대해 새롭게 공부하기 시작했다. 공부에 크게 도움을 준 사람은 국립중앙박물관장을 지낸 최순우였다. 최순우는 「무량수전 배흘림기둥에 기대서서」라는 명저를 지은 고고미술학자이다. 김수근은 최순우과 함께 전국에 있는 한국 고유 건축물을 찾아다니며 공부했다. 특히 전남 담양에 있는 소쇄원을 보고는 자연과 잘 어우러진 우리나라 전통 건축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이러한 공부 덕에 건축을 바라보는 안목은 더욱 넓고 깊어졌다.



스승 최순우, 그리고 건축 일화

김수근은 최순우를 ‘나의 건축가로서의 가장 소중한 눈을 길러 주신 스승’이라고 했다. 그 후 김수근은 매우 특별한 공간을 만들었다. 자신의 건축설계사무소 사옥인 ‘공간(空間)’이다. 그 건축물은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 건축물이며 건축전문가들이 찬탄하는 ‘김수근다운 건축물’이었다. 그 공간은 엄마의 뱃속 같은 편안함(그래서 김수근은 ‘모태 공간’이라 했다)과 어린 시절 즐겁게 뛰놀던 북촌 골목길의 재미로움으로 조화를 이루었다. 그곳에는 설계사무소뿐만 아니라 화랑과 공연장 그리고 카페와 마당도 들여놓았다. 그 공연장에서 병신춤의 무용가 공옥진과 사물놀이로 유명한 국악인 김덕수가 데뷔했다.

김수근에 대한 에피소드는 많다. 워커힐 산 위에 세운 힐탑바 이야기다. 김수근은 워커힐 꼭대기에 워커힐의 상징이 될 ‘W’형의 집을 설계했다. 모든 건축물의 기둥은 수직으로 세워야 무게도 받지 않고 쓰러지지 않는다. 이것은 건축의 기본이다. 그런데 김수근이 설계한 힐탑바는 정방형인데 모서리 기둥 네 개가 모두 밖으로 45도 각도로 기울였다. 설계도를 보는 사람마다 ‘매우 위험’하다고 했다.

김수근은 구조전문가와 공사전문가를 설득해 공사를 시작했다. 공사 중에 건축물 밑에 들어가면 건축물이 머리 위로 곧 쓰러질 것만 같았다. 공사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은 받침대를 떼어내는 일이었다. 받침대는 인부들이 떼어내는데 그들을 이해시키는 것이 가장 힘들었다. 김수근은 그 건축물이 안전하다는 것을 확신시켜주기 위해 인부들이 받침대를 모두 떼어낼 때까지 그 건축물 밑에 계속 서 있었다. 받침대는 모두 떼어졌고 힐탑바는 무너지지 않았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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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23-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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