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신한열 수사의 다리 놓기] 마지막 증언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1945년생 채영희씨는 부모님 얘기가 나오면 오늘도 눈물을 감추지 못한다. 아버지 채병기씨(당시 24세)가 미군정 치하에서 10월 항쟁과 연루되어 잡혀간 뒤로 가족에게 긴 고통과 질곡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1946년 10월 1일 대구에서 시작되어 12월 초까지 남한 전역으로 확산된 ‘10월 항쟁’은 식량난이 심각한 상태에서 미군정의 친일 관리 고용, 토지개혁 지연, 강압적인 식량 공출 정책에 불만을 가진 민간인과 일부 좌익 세력이 경찰과 행정 당국에 맞서 발생한 일련의 사건이다. 그 여파는 6·25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로 이어져 엄청난 규모의 희생자를 낳았고, 유가족들은 수십 년 동안 연좌제의 피해를 입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영희씨는 ‘빨갱이 자식’이라는 낙인과 이웃의 외면, 경찰의 감시 속에 유년기와 청년기를 보냈다. 어머니는 그에게 ‘아버지’라는 말조차 꺼내지 못하게 했다. 아버지가 큰 죄를 지은 나쁜 사람이 아니라 용감한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는 아버지를 원망했던 자신이 부끄러웠다.

아버지가 재판도 없이 억울하게 돌아가신 이후에도 경찰은 그가 월북했으며 간첩으로 내려올지 모른다며 감시와 괴롭힘을 계속했다. 어머니는 끼니때마다 따뜻한 밥을 담요 속에 묻어두고 명절이면 새 옷을 장만해 아버지를 기다렸다. 처절한 아픔의 삶을 살았던 어머니는 어떤 보상도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채영희씨는 “아버지라는 말을 마음껏 할 수 있어서” 성당에 나갔다. 하지만 좌익으로 몰려 죽은 이들과 가족의 사연에 귀 기울이는 성직자는 없었다.

노무현 정권에서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위원회’가 만들어지자 그는 조사를 거쳐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보상을 받았다. 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유족회 활동을 이어갔다. 마침내 2016년 대구시의회에서 ‘10월 항쟁 등 6·25전쟁 전후 민간인 희생자 위령 사업 지원 등에 관한 조례’가 제정되었고 2020년에는 학살지였던 대구 가창댐 아래에 위령탑이 세워졌다. 하지만 많은 시민들이 여전히 역사적 사실을 모른다.

채씨는 국사편찬위원회에 긴 증언을 남겼다. 트라우마를 물려줄까 두려워 자녀들에게조차 아버지 이야기를 하지 못했던 고령의 유족들이 말하기 시작했지만 들어주는 사람이 적다. 공익단체 ‘이음새’는 봉인된 기억인 유족 이야기를 동영상 시리즈로 제작하고 있다.(유튜브: 이음새_마지막 증언) 우리가 기억하고 공감하는 것은 유족의 트라우마 치유에 필수적이다.

한국 사회의 고질적인 편가르기와 진영 논리의 뿌리에는 해방 공간과 6·25전쟁 전후의 민간인 학살이 자리하고 있다. 국가 형성기에 있었던 이 비극은 이념과 정파를 넘어서는 보편 인권의 문제다. 유족 가운데는 보수 정당 지지자도 많다.

10월 항쟁이 역사 교과서에 실리고 아버지들의 명예가 완전히 회복될 날을 기다리는 채영희씨의 눈물은 아직 마르지 않았다.
신한열 프란치스코(떼제공동체 수사·공익단체 이음새 대표)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24-02-13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4. 29

마태 28장 20절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노라.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