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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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일본 26성인 시성 150주년 역사 · 의의 (상)

모진 박해 기꺼이 받아들이며 하느님께 감사 기도/ 도요토미 히데요시 박해로 어린이·외국인 선교사 등 그리스도인 26명 체포돼// 교토~나가사키 끌려가며/ 모욕·가혹한 고문 받았지만/ 순교의 길 묵묵히 걸으며 / 구원에 대한 희망 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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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건숙 수녀
한국과 일본은 거리만큼이나 천주교회 역사 또한 닮은 점이 많다. 박해의 칼날 속에서도 오직 하느님만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았던 신앙선조들의 순교 역사가 특히 그러하다.

1597년 2월 5일.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박해로 26명의 그리스도인이 순교했다. 나가사키 니시자카에서 흘린 순교자들의 피는 예수회와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선교사들을 통해 전 세계에 전해졌으며, 1862년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되면서 일본 신자뿐 아니라 전 세계 그리스도인의 가슴에 뜨거운 신앙의 모범을 새겼다.

일본 26성인의 시성이 올해로 150주년을 맞았다. 일본교회는 이를 기념해 오는 6월 10일 니시자카 순교지에서 ‘일본 가톨릭 나가사키 순례지 지정 제막식’을 연다.

본지는 26성인 시성 150주년의 역사·의의에 대해 나가사키 순례 안내 소임을 맡고 있는 이건숙 수녀(율리에타·예수성심시녀회)의 특별기고문을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한국과 일본의 가톨릭 역사 안에 다른 나라에서 찾아 볼 수 없는 아주 특이한 역사를 꼽는다면, 한국은 학문의 연구라는 구도(求道)의 길에서 하느님을 찾았다는 것이다.

그와 달리 일본은 선교사가 뿌린 복음의 씨앗에서 배양된 가톨릭 문화의 꽃을 어느 한 시기 아주 화려하게 피웠다.

그러나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명령에 의해 1597년 2월 5일 26성인의 순교로부터 시작된 박해는,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 가문의 막부로 정권이 바뀐 뒤에도 더욱 심해졌고, 수백 년 동안 긴 박해의 무서운 탄압 속에서 단 한 명의 사제도 없이 250년간을 신자의 손으로 교회를 지켜온 숨은 역사가 일본 가톨릭의 특이한 점이다.

그 모질고 험한 박해를 견디게 한 나가사키 니시자카 순교 역사의 시작이 바로 26성인의 순교다. 26성인 순교 이후 수백 년간 니시자카 순교자의 무대에서는 하느님을 증거하는 이들이 줄을 이어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고, 일본은 순교자의 나라로 알려지게 됐다.

1862년 6월 8일, 일본은 아직 종교의 자유가 인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아직 박해 기간 중이었다. 신자가 남아 있었는지도 알 수 없을 당시에 로마 교황청에서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일본 26성인’을 전 세계에 선포하였다. 그리고 5년 뒤 205위의 복자를 선언하여 일본교회에게 힘을 실어주었다.

1. 프란치스코회의 활동

1590년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가 주변국가에 대한 야심을 갖게 되자 1593년 필리핀의 총독은 마닐라에서 도요토미에게 사절단의 명목으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 4명을 파견했다. 1594년 시죠 호리카와(四條堀川)의 묘만지(妙滿寺)에 정주했고, 도요토미가 정주를 허락한 것은 종교적 허가로 받아들인다는 낙관적 의미로 생각하게 됐다.

이들은 성당을 건립, 10월 4일 프란치스코 성인 축일에 ‘천사의 모후이신 성모님’을 주보성인으로 모시고 축성식을 갖고 본격적으로 선교활동을 시작하였다.

2층 구조로 지하 2층에 회랑을 넣고 좌우에는 부제석, 성가대 자리까지 구비한 스페인식의 꽤 큰 성당을 지었다. 1595년에는 가난한 사람들과 한센병 환자를 위하여 안나병원과 요셉병원을 개설하였다. 환자는 점점 많아지고 병원에서 일하는 신자들은 병원 가까이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하면서 이 주위는 자연히 그리스도 신자들의 마을이 되었는데 이곳을 ‘다이우스(데우스) 마을’ 이라 하였다.

이즈음 1596년 10월 19일 산 페리호 사건이 발생한다. 스페인 무역선이 마닐라를 출발해 멕시코를 향하던 중 태풍으로 심하게 파손되어 토사(土佐)에 표류하였다. 배에는 일본이 목적지가 아니었던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회, 아우구스티노회 소속 신부와 수사 등이 타고 있었다.

이 소식을 들은 도요토미는 적하물을 몰수하고 선교사를 포박하는 등 불법적인 행동을 감행했다. 설상가상으로 항해사의 말이 불씨가 되어 도요토미를 크게 자극하였다. “스페인은 처음에는 선교사를 보낸 후 주민들이 신자가 되면 군대를 보내고 그 나라를 식민지로 만든다”는 말에 분노를 일으킨 히데요시는 12월 7일 교토 수도원 포위, 8일 프란치스코회원 체포, 9일 프란치스코회 관련자 체포, 1597년 1월 1일 오사카에서 4명의 관련 신자와 3명의 예수회원 등 24명을 교토로 호송했다.

당시 나가사키에 살던 예수회 루이스 프로이스 신부의 기록은 다음과 같다.

<그들을 태운 달구지가 옥문 앞에 다다르자 그들은 내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예수회 바오로 미키 수사는 자신들은 하느님께 큰 은혜를 받은 자로서 경건한 성 프란치스코회 신부에게 겸손한 태도로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포옹하며 “오늘 하느님의 자비로 처음으로 행복한 운명 받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신부님들의 덕택이라 생각하며 마음으로 감사드립니다”라고 정중하게 인사하였다. 감시인과 마부들은 이 광경을 보고 놀라 “이렇게(새가 날개 춤을 추는 듯한 마음의 격동을 일으키는 모양의 표현) 아름다운 사람을 보다니. 이 사람은 어떤 사람이기에 이런 모욕을 받고도 기뻐할까. 이런 사람이 세상에 다시 있을까?” 라고 서로 말을 주고 받았다. 그날 밤 몇 시간 후 바오로 수사는 그들을 위로하고 하느님의 위대하심과 은혜로움에 대해 설교하기 시작하였다. 옥 안에는 네다섯 명의 비신자 죄인들도 같이 있었는데 바오로 미키의 말을 들고 눈물을 흘렸다. 1597年 2月 5日(慶長元年 12月 19日)(ARSI, Jap.Sin, 53, f.71)>

프로이스 신부는 1597년 3월 25일 기록을 마쳤다. 프로이스 신부의 서명이 있는 원문은 로마 예수회의 고문서관에 보관돼 있다.



 
▲ 일본교회 첫 순교자 26인이 처형된 니시자카 형터에는 오늘날 순교기념관과 성필립보성당이 들어서 있다.
사진은 니시자카 순교기념관



가톨릭신문  2012-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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