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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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일본 26성인 시성 150주년 역사 · 의의 (하)

전 세계에 희망·치유·용서의 정신 널리 전파/ 선교사들 통해 사연 알려져/ 순교신심 전 세계 뿌리내려/ 비오 9세 교황 1862년 시성 // 올해 시성 150주년 맞아/ 순교지 니시자카 언덕을/ 일본교회의 순례지로 지정/ 10일 개막식 성대히 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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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해를 받고 끌려가는 24명의 그리스도인을 돕기 위해 행렬을 따라오던 두 사람이 있었다. 감시인들은 그들에게 신자의 여부를 묻자 자신들도 신자라고 대답했고, 이들도 체포하여 순교자들의 행렬에 넣었다. 이리하여 26명이 된다. 둘은 체포된 것을 애통하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부터 지복의 운명에 선택되기를 내심 바랐던 일로 환호하며 감사할 뿐이었다.

2월 4일 늦은 저녁, 오무라의 소노기(彼杵) 해변에 닿았다. 눈썹 같은 달은 공중에 걸려 있고 3척의 배가 기다리고 있었다. 여기저기 어촌의 불빛이 밤의 장막을 마주한 가운데 순교자들의 마지막 기도의 밤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겟세마니에서 성부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피땀을 흘리고 기도하시던 밤과 같은, 사탄이 유혹하는 밤을 보냈다. 기다리던 십자가를 끌어안기 위하여 최후의 힘을 모으던 영혼은 새벽을 맞이하였다. 몸은 비록 밧줄에 묶여 있으나 영혼의 날개는 깃털처럼 가볍게 천국의 문 앞에 서 있었다.

이제 물길을 가르고 수 시간 후에는 그리스도인의 도시 나가사키에 닿게 된다.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니시자카 갈바리아 언덕에는 4000명의 군중이 웅성거리고 형리들은 오히려 군중들이 무슨 일을 벌일까 긴장하고 있는데 순교자들은 개선장군처럼 구경꾼들을 위로하며 니시자카로 올랐다. 이미 현장에는 이름이 적혀 있는 26개의 십자가가 세워져 있었다. 나가사키가 출생지인 안토니오는 7개월 전 교토로 가 프란치스코회의 동숙자로 있었는데, 이제 부모가 보는 앞에서 순교의 금의환향의 옷을 입기 위해 돌아왔다.

요한 고토의 부모가 장한 아들을 지켜보기 위해 바다를 건너 왔고 아들은 아버지에게 묵주를 전해드렸다. 겨우 10달 전 세례를 받은 12살의 루도비코는 형장에 들어서자 차랑차랑한 목소리로 “내 십자가는 어디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루도비코의 질문에 형리들이 놀라고 아빌라 출신인 밥티스타 신부는 창이 아닌 못 박을 것을 청하며 두 손을 내밀었다.

바오로 미키 수사는 십자가에 묶여 자신을 바라보는 4000명의 군중 앞에서 마지막으로 입을 열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나는 필리핀 사람도 아니고 일본인 예수회 수사입니다. 그리고 어떤 죄도 범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전했기 때문에 죽는 것입니다. 나는 지금을 이용해서 내 앞에 있는 당신들을 속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의 구원은 그리스도를 통한 길뿐임을 단언하고 주저치 않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스도교의 가르침은 원수,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을 용서하라고 가르칩니다. 나는 국왕(도요토미 히데요시)과 나를 사형에 처하도록 책임진 모든 이들을 용서합니다. 국왕에 대한 미움은 없고, 오히려 그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이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프로이스, 1597년 「순교기록」 145항 발췌)>

가문 좋은 무사 출신의 바오로 미키는 “용서한다”고 말했다. 용서는 윗사람이 수하를 두고 하는 말로 죽음을 앞둔 죄인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었으며, 더욱이 당시 무사의 사회에서 통용될 수 없는 말로 언어의 새로운 혁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3. 순교지 니시지카

1597년 2월 5일 정오. 니시자카에서 일본인 20명과 6명의 외국인은 귀한 생명을 다하여 하느님께 최후의 증언을 하였다.

교토에서 나가사키의 850km 순교의 길은 세계 역사 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아름다운 길이다. 26성인의 순교 후 처형 때 사용했던 십자가는 1597년 여름까지 형장에 그대로 걸어 두었다.

나가사키 신자들은 순교자들을 지극히 공경하여 감시자의 눈을 피해 일부의 유해를 가져가기도 했다. 순교자들의 유해를 치우고 십자가가 서 있던 곳에 나가사키 신자들은 1년 내내 푸른 잎을 가지고 꽃을 피우는 동백나무를 심어 순교자를 기억하였다.

해마다 들어오는 포르투갈 선박은 나가사키에 입항할 때마다 순교자들을 기억하며 니시자카를 향하여 예포(禮砲)를 쏘아 경의를 표하고 있다.

어느 사이엔가 나가사키의 신자들은 니시자카를 ‘마르치레스(순교자)’라 부르고 신자들 사이에서는 자주 “자 마르치레스에”란 말을 하게 되었다. 어떤 이는 맨발로 언덕을 오르기도 하고 금요일과 토요일에 순교지를 찾는 이들도 많았다.

그들은 순교자와 만나 좌절에서 희망을, 상처에서 치유를, 미움에서 용서를 찾아갔다.

4. 세계 속의 26성인

순교의 소문은 바다를 건너 프란치스코회와 예수회 선교사의 손을 통해 일찍이 전 세계로 알려졌다. 성인 출신지 나라뿐 아니라 타국에서도 일본 순교자의 공경이 급속히 전해졌다.

이미 시복식 이전에 26순교자에 대한 책자가 발행 됐고, 목격자들의 이야기를 듣고 그린 성화, 포르투갈과 멕시코의 대 성전 벽화, 이탈리아 판화의 다수는 유명하다.

그림을 통하여 유럽과 다른 나라에서 일본의 순교자들을 공경하기 시작하였으며 일본과 관계없는 볼리비아의 수도원 성가대 자리에는 성인들을 조각하여 공경하기도 했다.

순교자들은 두 그룹으로 나뉘어 시복되었다. 당시의 일본은 도쿠가와 막부에 의한 심한 박해 중에 있었으나, 바티칸은 일본 신자들에게 큰 용기를 주기 위하여 1627년 우르바노 8세 교황에 의하여 프린치스코 관련자 23명이 1차 시복되고, 2년 후 1629년 예수회 3명도 시복되었다.

시복식은 두 차례 나뉘어 거행됐으나, 1862년 6월 8일 비오 9세 교황에 의해 시성될 때에는 정식명칭 ‘일본 26성인’으로 통합되었다. 또한 순교 당시의 대표자는 밥티스타 신부였으나 바오로 미키 수사로 바뀌었고, 순교일 2월 5일이 아가타 성녀 축일과 중복되므로 일본에서만 2월 5일에 축일을 지내고 그 이외 나라에서는 2월 6일로 지낸다. 당시 음력을 사용하던 일본력으로는 게이초(慶長·일본의 연호) 12월 18일이다.


 
▲ 바오로 미키 성인상.
 

 



가톨릭신문  2012-06-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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