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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성녀 데레사 가르침에 따른 주부적 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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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부적 관상 성녀 대 데레사는 묵상의 단계와 관련 수덕적 잠심의 묵상(수득적 관상)에서 주부적 관상에로 들어갈 때는 장기간 노력이 필요하다고 강조하고 있으며 겸손과 극기와 이탈의 순수성 및 여러 가지 덕을 닦는 노력 등을 보시고 주님께서 선사하시는 것이라고 덧붙인다. 「완덕의 길」을 통해 제시한 관상의 단계는 다음과 같이 진전된다. 1)잠심의 기도(28장) 능동적 관상으로 단순화되고 애정 있는 묵상을 말한다. 그러나 영혼이 자신 안에 틀어박혀 분심에서 자신을 지키려고 하는 점에 노력이 엿보인다. 2)고요의 기도(30 31장) 수동적이고 초자연적인 순수 관상의 시초다. 여기에서도 세 단계의 시기가 작용한다.
첫째시기는 특별한 하느님 은총의 결과로 자유 의지를 집중하는 수동적 잠심이 생기는 때를 말하고 둘째 시기는 참된 고요(정온(靜穩))로서 의지가 완전히 하느님께 향해 있는 것이다. 셋째 시기는 의지가 사로잡히고 오성도 고찰을 중지하며 하느님께 사로잡혀 있지만 상상력과 기억력은 아직 산만한 단계. 그러나 이 단계들은 성령이 주신 특은의 결과이므로 이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억지로 노력해서는 안된다. 하느님이 주시지 않는 한 스스로 도달할 수 없다. 3)수동적-초자연적 관상(32장) 영혼의 내적 능력이 전부 사로잡히는 시기다. 때로는 외적인 감각도 일시적으로 그 활동이 중지된다. 대데레사가 제시한 주부적 관상에 도달하는 것은 우리의 자유 의지에 의한 것이 아니다.
이를 위해서는 주께서 은총을 주셔야 한다. 아직 그 은혜를 주시지 않았는데도 지혜의 활동을 거절한다면 그사람 에게는 이익이 아니라 손해가 끼쳐 올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단순한 태만과 졸음에 지나지 않겠기 때문이다.
주부적 관상에 이르기 위해 우선적으로 필요한 활동은 피조물로부터 이탈하여 이탈의 정신을 자기 자신안에 배양하는 것이다.
우선 평소의 잠심 마음의 순결 참된 겸손 「묵상」 기도에 충실하면서 날마다 십자가를 초자연적으로 짊어지고 형제적 애덕과 성령에 충실하는 생활이 전제되어야 한다. ■ 정적(靜寂)주의의 오류 조용하게 관상할 것만을 권하면서 자기 마음대로 행동하는 것은 악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은 관상생활에 대해 아주 잘못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1)몰리노스의 정숙주의 이 오류의 대표적인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사람은 그 능력을 무(無)화 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무엇을 하고 싶다고 생각하기만 해도 하느님을 모욕하게 된다. 왜냐하면 하느님만이 우리 안에서 행동하시기 때문이다』 이 주장에 의하면 행동하고 싶다는 생각만 해도 죄가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전적으로 수동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모든 활동이 은총에 적대하는 것이며 완덕에 방해가 된다고 한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비판이 따른다. 우선 우리들의 기도 중에 하느님께서 은총으로 행동하시게 될 때 우리의 마음은 수동적 상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보통 장기간 수덕하여 묵상을 실행하고 나서 경험하게 된다. 이에 대해 몰리노스는 『도는 하나밖에 없다. 이것은 내적 길이며 사람이 획득할 수 있는 수동적 관상의 길이다. 이것은 행동을 중지함으로써 획득한다. 그레서 곧 그것에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외에도 몰리노스의 설은 명백히 틀린 내용이 많기 때문에 그다지 큰 영향력을 끼치지는 않았지만 단 주의해야 할 것은 일반 신자들에게도 「수동적」이라는 의미가 「그다지 노력하지 않아도 된다」든가 또는 「구송보다도 묵상이 더 높다」고 보고 필요한 단계를 거치지 않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묵상에만 다다르려 생각 감수성에 따른 움직임 등 이상한 방법만을 떠올리고 결국 정적주의와 비슷한 오류를 범할 위험이 없지 않다.
2)반(反)정적주의
이 설은 특히 「순수한 사랑」에 대해 오류를 범하고 있다. 내용에 있어 정적주의와 비슷하나 몰리노스만큼 가톨릭 교의에서부터 멀리 떨어져 있지는 않다.
예를들면 완전한 관상 생활 상태에 있어서는 영혼이 어떤 의미에서 무(無)가 되고 온전히 하느님 뜻에 의탁한 상태가 되니까 자기 자신의 구령에 관해서는 무관심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을 그들은 「순수한 사랑」이라고 말하지만 구령에 대해 무관심해도 좋다는 것은 분명한 오류다. 이것이야말로 망덕(望德)을 잊는 것으로서 성인들이 항상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사실을 무시하는 처사가 아닐 수 없다. 자기 구령에 대한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애덕 그 자체를 버리는 것이 된다.
이외에 반정적주의는 높은 관상 생활 상태에 도달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성은 도움이 되기 보다 방해가 된다고 주장하는데 그러나 대데레사는 대단히 높은 관상 생활 상태로 올림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발현을 맛볼 은혜를 받은바 있다.
가장 높은 단계 생활인 관상 생활에 빨리 도달하려는 데는 주의가 필요하다. 그것이 아직 무엇인지 모르는데도 더구나 준비 노력 희생심도 필요하다는 것은 인식하지 못하고 곧바로 관상 생활에 나아가려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틀린 사고 방식으로 빠져버린다. 정적주의나 반정적주의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이다.
박일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03-0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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