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7일
사람과사회
전체기사 지난 연재 기사
[특별기고] 박해주년 과 순교기념 의 차이

폰트 작게 폰트 크게 인쇄 공유

우리에게는 기억할만하거나 기억해야 할 일이 너무나 많다. 개인이나 가정은 물론이고 공동체나 국가 또한 마찬가지다. 한국 가톨릭교회도 이제 두세기를 넘는 역사를 갖게 되면서 더 많은 것을 기억해야만 하게 됐다. 그러나 모든 것을 잊지 않고 하나하나 챙겨가면서 기념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우리가 그 많은 일 중에서 의미 있는 것이 무엇이냐? 에 초점을 맞추고 여기에 주년 이나 기념 이라는 단어를 붙여 새롭게 되새겨 보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제 2001년 1월이면 신유박해와 이로 인해 죽음을 당한 수많은 순교자들의 신앙과 행적을 기억하고 동시에 역사적 의미를 부여해 볼 수 있는 200주년을 맞게 된다. 요즘 신유박해 200주년 이란 구절을 자주 언론에서 발견하게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단순히 지나칠지도 모르는 모순이 내재해 있다. 교회나 신앙 후손의 입장에서 과연 박해에 기념이란 단어를 붙여 사용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다.

신유박해는 1791년 신해박해에 이어 1801년 한국천주교회가 받게 된 두번째의 공식적인 박해이며 을사년(1785년)의 사건과 정사년(1797년) 이후의 충청도 박해 을묘년(1795년)의 포도청 순교사실까지 포함하면 다섯번째의 교회탄압사건이 된다. 그러나 박해의 규모나 교회가 입은 타격 순교의 범위 등에서 본다면 초기 한국교회가 겪은 최초의 대박해라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겨우 터전을 잡아가던 교회의 뿌리와 신앙의 싹이 잘려나간 엄청난 사건이며 박해였다.

물론 여기에서 신유박해의 내용과 성격을 설명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교회 안에서 중시해야 할 의미가 박해 자체에 있는 것인가 아니면 박해로 인해 탄생한 순교자에 있는 것인가 에 있다. 어느 한쪽에서만 본다면 정치·사회적 문제와 관련된 사건 자체가 중시될 것이지만 복음사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 방향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실제로 교회 안에서는 그동안 천주교를 증오하는 무리들이 일으킨 박해나 사건보다는 순교자의 용기 있는 행적이나 영광을 중시해왔다. 기해·병오 박해보다는 기해·병오 순교자를 병인박해보다는 그 결과로 탄생한 순교자들의 영광을 기억해왔다.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이러한 의미를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신유박해 200주년 이란 말을 사용해오고 있다. 그러나 박해 사건에는 주년 이란 단어를 붙여 사용할 수 있지만 기념 이란 단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2001년에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신유박해로 인해 죽음을 당한 신앙 선조들 이고 기념해야 할 것은 순교자들의 혁혁한 순교 행적 이다. 따라서 위의 구절은 당연히 신유(박해) 순교(殉敎) 200주년 기념 으로 고쳐 사용해야 할 것이다.

2001년의 기념 행사는 궁극적으로 모든 신자들이 초기 순교자들을 자발적으로 현양하고 이를 시복·시성운동으로 승화시키자는데 그 목적이 있다. 천주교를 증오하는 무리들이 일으킨 박해를 기념하는 모순을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될 것이다. 박해 자체와 관련된 연구는 그 기념을 위한 일부분의 작업일 뿐이다. 그러므로 이와 같은 모순이 고쳐질 때 모든 이들이 2001년의 기념행사가 지니는 의미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행사 자체도 훌륭한 열매를 맺게 될 것이다.

차기진 (루가 양업교회사연구소 소장)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00-09-24

관련뉴스

말씀사탕2024. 5. 17

1코린 14장 1절
사랑을 추구하십시오. 그리고 성령의 은사, 특히 예언할 수 있는 은사를 열심히 구하십시오.
  • QUICK MENU

  • 성경
  • 기도문
  • 소리주보

  • 카톨릭성가
  • 카톨릭대사전
  • 성무일도

  • 성경쓰기
  • 7성사
  • 가톨릭성인


GoodNews Copyright ⓒ 1998
천주교 서울대교구 · 가톨릭굿뉴스.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