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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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사형, 폐지되는 그날까지] 2. 김지하 시인

사형제는 마땅히 폐지돼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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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법률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교양수준 정도에서도 너무 먼 거리에 있다.

문리과 대학에서 공부하던 대학시절에 한두 차례쯤은 청강했을 법한 법철학강의조차 내 기억엔 별로 없다. 아! 있다. 딱 한번 최재희 교수의 헤겔법철학 강요를 들은 것. 그리고 기억의 연쇄에 따르면 또 하나, 황산덕 교수의 책 ‘복귀(復歸)’를 읽은 경험이 전부다.

이 두 번의 경험만으로 법률에 대한 견해가 형성될 까닭이 없다. 그럼에도 내가 법률에 대해 이러니저러니 말도 하고 글도 쓴 일이 있다면 그 원인은 딱 한 가지. 20대부터 드나들기 시작한 감옥이니 중앙정보부 지하실이니 법원이니 재판과 항소이유서 따위 때문에 법이 어쩌고 정의가 어쩌고 반공법, 긴급조치, 내란죄 같은 것을 입에 올리며 글로 쓰게 된 그 까닭에서다.

나는 법률이 싫다. 그러나 또한 나이 먹는다는 것은 곧 이 사회가 법률을 필요로 함을 인정해 가는 과정일 것이다.

20대 초반 한일회담 반대운동 때문에 투옥됐을 때 나를 취조하던 한 젊은 법무관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강의를 들었던 일이 기억난다.

“법초월적 정의가 법내재적 정의를 이겼을 때는 당신들이 옳다. 그러나 반대로 법내재적 정의가 법초월적 정의를 이겼을 때는 당신들을 처벌하는 쪽이 옳다.“

또 무슨 궤변이거나 아니면 갈데 없는 둔사(遁辭)였다. 그 뒤로 친구들끼리 술만 먹으면 그 말을 인용해 떠들어대며 웃곤 했으니 말이다.

감옥에 있을 때 자주 사형장 앞을 지나며 그 우중충한 풍경에 오소소 소름이 등골을 스치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많이 들었다. 사형수가 사형장으로 끌려가다가 갑자기 도망을 치는 이야기. 아니면 허리가 팍 꺾어지는 이야기, 제풀에 주저앉으며 똥을 싸버리는 이야기 등등….

이 모든 이야기가 나로 하여금 법률을 싫어하게 하고 또 반대로 법률의 필요성을 인정하게 된 뒷날에도 역시 사형제도만은 반대하게 된 바로 그 근원이기도 하다.

기독교가 출현하게 된 배경이었던 동태복수(同態復讐)적 율법의 시커먼 그림자에 불과한 사형제도는 그러나 경험의 유무(有無)나 호불호(好不好)에 관계없이 나는 적극적으로 반대다. 생명의 근원적 파괴이기 때문이다.

우리들 인간 그 누구에게도 인간을 사형시킬 권리는 없다. 자연적 ‘죽음’과는 다른 인위적 ‘죽임’은 신에 대한 정면도전이기 때문이다. 하기야 신마저도 죽여 버린 세태에서 내 이야기가 결코 통할 리 없을 터이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나는 반대다. 한때 나 자신이 사형수였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슬프다거나, 불쌍하다거나, 절망적이라거나 한 그런 차원의 의미가 아니다. 나, 그리고 당시 민청학련 관련자로서 사형선고까지 받았던 젊은이 여럿이 그 사형선고에 대해 보여준 반응 때문에도 이런 말을 한다. 사형이 선고되자, ‘영광입니다!’ 아니면 ‘웃기고 자빠졌네!’ 아니면 ‘헤헤헤헤헤’ 그것은 이미 법률이 아니었다.

우리는 사형선고임에도 항소를 포기했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미 확실하다. 법은 이미 법이 아니었다. 유신헌법이나 긴급조치가 나쁜 것이지 사형제도가 나쁜 것이 아니라는 변명이 있다면 그 말 자체가 이미 법초월이니 법내재적이니 하는 따위의 궤변이나 둔사에 지나지 않는다. 그게 그거다.

박정희 유신은 법철학 자체의 파괴행위였고 사형제도가 법률일 수 없음을 극적으로 증거한 일대 문명사적 스캔들이다.

한발 더 나가자. 사형을 합법화하는 현존의 근대법제와 근대 법철학은 그 자체가 이미 낡아빠진 비법(非法)인 것이다. 어째서? 반생명(反生命)이기 때문이다.

내 경험이다. 선고가 사형으로 떨어지자 독방(獨房)이라는 지옥에서부터 나의 실존적 삶은 대번에 연옥쯤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다. 내 사랑하는 도둑님들과 합방(合邦)이 이루어졌고 불법이지만 ‘강아지(담배)’를 잡을 수(피울 수)있었기 때문이다.

우스운가?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사형이 이미 사형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항용 도둑님들은 운동시간에 운동장 저 건너에서 수갑을 찬 채 열심히 운동하는 사형수를 보면서 서로 지껄인다.

‘저 사형수 지금 뭐라고 중얼거리며 뜀질하는지 아나?’ ‘뭐래는데’ ‘죽을 때까지 살아보자! 죽을 때까지 살아보자!’

이것이 사형제도라는 것이다.

다음은 어느 사형수가 저도 몰래 뱉어낸 중얼거림이라고도 한다.

‘죽여도 좋고 안 죽이면 더욱 좋고…’

사형제도에 대한 명백한 사보타지다.

이따위로 저항 받는 제도가 어찌 법률이겠는가!

마땅히 폐지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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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07-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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