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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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특집] 우리 생애 가장 아름다운 40일 II [3주차]

금단현상 경험하며 ‘참아내느라’ 안간힘 쓰고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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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제의 시간이 진행되면서 커피, 술, 스마트폰을 끊기로 한 기자들의 결심이 점차 힘들어 지고 있다. 아직 중반에도 이르지 못하고 있는 사순시기. 금단현상을 경험하기도 하면서 ‘참아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모습이다. 그 힘든 만큼의 시간 역시 독자들과 약속했던 가장 아름다운 40일을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리라.



‘커피 끊기’ 이주연 기자

“한참 시간이 지난 듯한데 이제 10여일

거리엔 웬 카페가 이렇게 많은 것일까”


‘커피’를 돌같이 보기로 한지 10여 일이 지났다. 40일의 결심 중 절반에도 다가서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미 한참 시간이 지난 듯한데, 아직 종착점이 멀었다.

그리고 슬슬 금단현상이 생기는 듯하다. 아침과 식후의 시간이 유독 심하다. 그간 녹차나 홍차로 커피 마시고픈 아쉬움을 대신했는데, 이제 인내의 한계점이 다가오고 있음을 실감한다. 자주 짜증스러워지고 온 몸이 간질간질해지는 느낌. 집에서는 커피 머신을 아예 분해해 놓았다. 커피 마실 꿈도 못 꾸게 하기 위한 나름의 안전장치다.

하지만 내 심정과 달리 주변에는 커피가 넘친다. 옆자리에서 부러 한껏 커피향을 풍기며 커피 마시는 티를 내는 동료 기자의 모습도 성질을 돋우고 TV를 켜면 광고 속에서 커피를 마시라 유혹한다. 거리에 나서면 한집 건너 한곳이 카페들이다. 마주칠 때마다 ‘어서 들어와 커피 한잔 하고 가세요’라고 말을 거는 듯하다. 언젠가 미국서 잠시 귀국한 후배가 “한국엔 웬 카페가 이렇게 많냐?”고, “한국은 밥보다도 커피를 즐기는 민족인 것 같다”고 했던 말이 생각났다.

취재처를 방문하니 처지(?)를 아는 이들이 녹차, 유자차, 국화차 등 다양한 종류의 차를 건네며 나의 결심을 배려해 주었다. “그 좋아하는 커피를 못 드셔서 어떻게 하냐”며 위로의 말도 주었다. 하지만 그 중에는 꼭 짓궂은 이들도 있기 마련. “이제 커피는 일상인데, 그것이 뭐 그리 큰 사순절 극기 절제가 될 수 있느냐”며 딴죽을 건다. 그리고는 “이 참에 한잔 마시라”며, 짙은 향의 커피 잔을 내민다. ‘마귀’ 가 따로 없다.

 
한편 가톨릭신문을 보고 커피 끊기에 같이 동참했다는 한 사제를 만나볼 수 있었다. 그간 사순절 마다 계속 커피를 끊어 왔다가 올해는 미처 생각을 못했었는데, 기사를 보고 다시 커피 끊기에 도전하게 됐다고 했다. 그리고는, 금단현상의 출현으로 커피 끊기가 더욱 괴로워지고 있는 나에게 참으로 격려가 되는 말을 남겼다. ‘참는 것만으로도 예수님을 위하는 일이 될 수 있다’는 것이었다.

퇴임을 선언한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해 재의 수요일 알현 자리에서 “40일 동안 광야에서 지낸 예수님처럼, 가톨릭교회와 신자들은 사순시기에 하느님 은총을 체험하지만 동시에 그들을 둘러싸고 있는 사탄으로부터 권력과 이기심의 유혹을 받는다”며 “사막에서의 체험이 곧 은총의 시간으로 변모된다”고 지적하신 바 있다.

커피 한잔이 주는 즐거움을 애써 인내하며 그 작은 기회 속에서도 예수님을 생각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크나큰 은총의 시간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금주’ 서상덕 기자

“가장 많이 듣는 말 가운데 하나가 ‘기적’

상상 못하던 일이 일상이 되고 있다니”


이 글을 써야하는 순간이 다가오면 한숨부터 나온다.

어렸을 때, 예수님이 광야에서 40일 동안 뭘 하셨을까 무척이나 궁금했던 적이 있다. 악마가 나타나기 전까지 꽤나 심심하지 않으셨을까.(어린 마음엔 그랬다.) 그런데 내가 지금 그렇다. 삶에서 중요한 뭔가가 빠진 것만 같다.

가끔씩 ‘몰아’(?)지경에 빠지기도 한다.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가도 ‘약속’ ‘안주’ ‘광장’ 등과 같이 조금이라도 술과 관련된 단어가 함께 떠오르면 생각은 이내 뒤죽박죽이 돼버리고 만다. 한동안은 연관어가 명사형에 머물다 이젠 ‘시원한’ ‘맛있는’ ‘끝내주는’ 같은 용언으로까지 전이되면서 술에 대한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다 꼴깍 침이 넘어간다. 이런 게 금단현상인가. 평소 안하던 짓을 하려니 머리나 몸이 비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다.

금주선언을 한 후 술자리에서 몇 가지 변화가 생겼다. 술잔을 받는 일과 술병을 들어 ‘병권(甁權)’을 행사하는 일은 확연히 줄었다. 대신 딴 사람의 술잔이나 술병 속의 술높이를 열심히 관찰하게 된다. 늘어나는 술병 수를 세다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 앞에 놓인 술잔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건배용’으로 따라놓은 술잔을 들어 몰래 코끝에 대어보기도 한다. (크, 죽이는…. 이래서는 오래 못 가는데.) 술을 입에 안 댄 날이 별로 없는 나에게 지금 겪고 있는 금주의 길이 어떨지 상상하기 힘들 것이다. (나도 이런 일이 일어날 거라곤 생각해본 적이 없으니.)
  


가톨릭신문  2013-0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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