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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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림특집] 별이 되어 주어라 (2) ‘갈거리 사랑촌’ 곽병은 원장

22년간 사재 털어 빈곤층과 함께 … ‘원주 슈바이처’
1991년 사랑촌 개원 … 140만 장애인·노숙인 등 돌봐
‘다른 마음’ 먹게 될까봐 5년만에 교구에 공동체 기증
“차별 편견없이 우리 모두 한 식구, 내 역할은 봉사자”
“사랑촌 식구들과 한데 묻혀야죠” … 가족묘도 옮겨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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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갈거리 사랑촌 곽병은 원장의 사무실에는 곽 원장이 직접 쓴 ‘신독’(愼獨)이라는 서예 작품이 있다.
‘홀로 있을 때 몸과 마음을 삼간다’는 뜻이다.
 
 
우리말에 ‘뼈를 묻는다’는 말이 있다. 어느 한 분야에 자신의 모든 삶을 통째로 바칠 때 비유적으로 ‘뼈를 묻는다’는 말을 쓴다.

사회복지법인 원주가톨릭사회복지회 ‘갈거리 사랑촌’ 곽병은(안토니오·60·원주 흥업본당) 원장은 실제로 자신이 땀과 눈물로 22년간 일궈온 갈거리 사랑촌 뒷동산에 묏자리를 봐둔 지 오래다. 곽병은 원장은 오랜 세월 ‘원주의 슈바이처’로 널리 알려졌고 20여 년간 교회 내외의 언론매체는 곽 원장이 걸어온 길을 속속들이 보도했다. 사실 그는 ‘스타’다.



1991년 8월 원주시 흥업면 대안리에 갈거리 사랑촌을 개원한 이래 지적장애인 시설 ‘베닉노의 집’, 노인복지시설 ‘아녜스의 집’, 노숙인 자립시설 ‘원주노숙인센터’와 무료급식소 ‘십시일반’, 한국 최초의 복지형 협동조합인 ‘갈거리 협동조합’, ‘봉산동 할머니의 집’ 등 곽 원장이 그동안 장애인, 행려자, 독거노인 등 빈곤층을 위해 사비를 털어 헌신한 내력은 늘 언론의 관심을 받아 왔다. 원주시민대상(2001년), 대한민국인권상(2006년), 동곡상(2012년) 등 곽 원장이 받은 상을 나열하기에도 숨이 차고 지난달 25일에는 사회복지분야 최고상인 아산상 대상을 받아 또 한 번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정작 곽 원장 자신은 “저는 갈거리 사랑촌 공동체에서 생활하는 분들과 똑같은 식구이고 구성원일 뿐”이라고 강조한다. 상투적인 수사나 가식으로 들릴 수도 있다. 그러나 갈거리 사랑촌 뒷동산에 조성된 2기의 묘를 보면 곽 원장의 진의(眞意)가 눈으로 들어와 뇌리에 박힌다.

갈거리 사랑촌 초창기에 세상을 떠난 고령 노인들 10명의 합장 납골묘와 ‘곽씨 가족묘’가 한 치 차이도 없이 똑같은 모양으로 나란히 조성돼 있다. “저도 사랑촌 식구니까 당연히 여기 묻혀야죠”라고 말하는 곽 원장은 갈거리 사랑촌을 만들 당시부터 이곳에 묻히겠다는 염원을 가졌고 2011년 가족회의를 거쳐 경기도 용인 선산의 집안 조상 묘를 사랑촌으로 이장해 왔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24년간 원주에서 ‘부부의원’을 함께 운영하며 갈거리 사랑촌을 묵묵히 도왔던 아내 임동란(베로니카·60)씨와 집안 모두가 곽 원장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곽 원장은 대안리에 있는 자신의 집을 아예 처분하고 1년쯤 후에는 사랑촌 안에 아내와 아담한 ‘원룸’을 짓고 사랑촌 식구들과 살 생각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교에서 말하는 평등입니다. 사랑촌에는 어떤 차별도 없습니다. 장애인과 비장애인, 부자와 가난한 자 모두가 한 식구이고 저도 원장이 아니라 식구 중의 한 명이자 봉사자입니다.” 곽 원장은 가장 가난한 모습으로 태어나신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고대하는 대림시기를 묵상하며 예수께서 다시 이 땅에 오신다면 갈거리 사랑촌을 보시고 기뻐하실 것이라고 여기는 듯했다.

갈거리 사랑촌에는 어떠한 ‘벽’도 없다. 사랑촌 내부가 한 식구이듯 사랑촌 외부와도 한 식구다. 곽 원장은 복지시설의 대형화와 폐쇄성을 경계해 왔다. 사랑촌을 직접 가 본 사람들은 옹기종기 가정집처럼 모여 있는 지적장애인과 노인들의 생활공간을 보고 “복지시설이 아니라 동화 속의 마을 같다”라고들 말한다.

“건물을 하나로 크게 지어서 복지시설을 운영하면 원장이나 직원들은 보호대상자들을 관리하기는 편해지지만 그분들을 가족으로 여기지는 않습니다. 사랑촌과 한 마을을 이루는 대안리 주민들이 사랑촌을 사랑방처럼 매일 놀러오는 이유도 사랑촌과 지역사회가 서로를 이웃이라 여기기 때문이지요.” ‘갈거(葛巨)리 사랑촌’이라는 이름 역시 ‘큰(巨) 칡(葛)이 나는 마을’이라는 대안리 주민들이 누대로 불러온 지명에서 따왔다.

곽 원장은 사재로 땅을 구입하고 건물을 지은 갈거리 사랑촌을 불과 개원 5년만인 1996년 원주교구에 기증했다. “보다 투명하고 내실 있게 운영되고 제가 죽고 나서도 사랑촌의 정신이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제가 원장이라는 직책에 앉아 있다 ‘다른 마음’ 먹게 될까봐 일찌감치 교구에 넘겼지요.” 사랑촌 곽 원장 사무실 출입문에는 ‘자성당’(自省堂, 스스로 성찰하는 집)이라는 당호가 붙어 있고 내부에는 그가 직접 쓴 서예작품 ‘신독’(愼獨)이 걸려 있다. ‘남이 보지 않는 곳에서 말과 행동을 삼감’이라는 뜻이다. 커다란 사랑의 실천을 위해 그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를 보여준다.

곽 원장이 아산상을 수상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사랑촌으로 들어오는 대안리 시골길 어귀에는 이색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경축 갈거리 사랑촌 곽병은 원장 아산상 대상 수상, 대안2리 주민일동’이라고 적힌 플래카드가 걸린 것이다. 동네 주민들이 곽 원장의 일을 내 가족 일처럼 한마음으로 기뻐하는 모습이 보는 이들을 흐뭇하게 했다. 동방박사들이 2000년 전 환희에 넘쳐 쫓아갔던 베들레헴의 별, 예수님의 탄생을 알리던 바로 그 별 같은 존재로 곽 원장이 우리 시대에 살며 땅 위에서 ‘별’의 역할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곽 원장은 의대 재학시절부터 나병환자와 윤락여성, 교도소 재소자 등 가장 외롭고 소외되고 배고픈 이들에게 온정의 손길을 내밀었고 갈거리 사랑촌을 가꾸며 이 땅의 별이 됐다. 그를 별이 되게 한 2개의 별이 있다. 별은 또 다른 별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2004년 돌아가신 아버지 곽한근(베닉노)씨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의사가 돼 서울에서 개업했고 부자가 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가난한 이들을 무료로 수술해 줬고 쌀과 연탄을 나눠주곤 했다.

곽 원장은 아버지가 선종한 후 3년 동안 ‘아버님 전 상서’로 편지를 썼다. 하늘나라에 있는 아버지와 음성으로는 대화할 수 없어 글로 써 부친 것이다. 편지글을 모아 나온 책이 「그리운 아버님」이다. 오래전에 선종한 할머니 지원순(아녜스)씨는 경기도 이천 오천리의 첫 천주교 신자였다. 불원천리 공소를 오가던 할머니의 신앙은 어린 가슴에도 큰 자국으로 남아 곽 원장에게 신앙의 나침반 같은 별이 돼 주었다.

개원한 지 22년이 지난 갈거리 사랑촌은 초기에 폐가나 다름없는 민가를 수리해 썼지만 지금은 모두 헐리고 새 건물이 지어졌다. 오직 ‘빈자(貧者)의 성모상’만이 처음 세워진 모습 그대로 사랑촌이 걸어온 길을 지켜본다. 곽 원장은 일기 형식으로 써 온 글을 모아 최근 펴낸 「140만 그릇의 밥」에서 고백했다. “다들 잠이 들고 고요한 늦은 밤에 갈거리 빈자의 성모상 앞에서 자주 기도를 드렸다. 이곳이 오래오래, 가능하면 영원히 어려운 이웃을 위한 곳이 되기를, 이런 내 마음이 변치 않게 해달라고”

곽 원장은 갈거리 사랑촌의 여러 공동체 안에서 이름 없이 봉사하고



가톨릭신문  2013-1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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