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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활특집-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살리라] 103위+124위 = 성숙한 신앙

시복시성, 오늘을 사는 우리의 신앙쇄신·성숙 위한 것
103위 시성 후 이룬 양적 성장 비해 질적 성숙 부족
한국교회 스스로 일궈낸 순교자 124위 시복 결정
세상 속 ‘빛’ 되어 하느님께 다가가는 지름길 삼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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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4년 5월 6일 서울 여의도광장에서는 복자 교황 요한 바오로 2세 주례로 ‘김대건 안드레아와 정하상 바오로 및 101위 동료 순교자들’의 시성식이 거행됐다. 103위 성인이 탄생된 것이다. 다음 달이면 103위 성인 시성식 30주년이 된다. 그리고 올 여름, 한국교회는 교황 방한과 함께 124위 신앙 선조들의 시복식을 맞게 된다.

하지만 103위 성인을 모신지 3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의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얼마나 순교 성인들의 삶과 정신을 투철하게 이어받기 위해 노력했던가? 새로 124위의 복자 탄생을 앞둔 우리는 부끄럽지는 않을까? 시복식을 앞둔 부활대축일을 맞아, 순교와 부활의 참 뜻을 되새기며 103위 성인과 124위 복자 탄생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해본다.

■ 103위 성인 시성식 후 신자 수 급증

103위 성인이 탄생하는 순간은 한국교회에서는 물론이고 세계 가톨릭교회사에서도 하나의 이정표였다.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대회와 함께 거행된 103위 성인 시성식은 아비뇽 교황 시대 이후 바티칸 밖에서 이뤄진 최초의 시성식이었기 때문이었다. 더욱이 100만 명 이상의 신자가 한자리에 운집했던 이 시성식은 전 세계 가톨릭신자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던져줬다. 1984년 당시 한국 천주교 전체 신자 184만여 명 중 100만 명 이상이 한날한시에 모였다는 것은 지금으로서는 상상조차 하기 힘든, 성령이 이뤄낸 일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103위 성인 시성 30주년을 앞둔 현재 한국교회가 시성 30주년을 얼마나 기념하고 있는지 살펴보면 이상하리만치 조용하다. 수원교구 손골성지 ‘103위 시성 30주년 기념 순교자 신심피정’, 한국교회사연구소 ‘103위 시성 30주년과 한국교회’ 특강, 절두산순교성지 한국 103위 순교성인 시성 30주년 기념 특별전 ‘응답하라 1984’, 대전교구 신리성지 ‘다블뤼 주교 기념관 축복식’ 등이 눈에 띈다. 한국교회 전체적으로 또는 교구 차원에서 대규모로 시성 30주년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곳은 아직까지는 드문 것으로 보인다.

103위 성인 시성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은 최우선적으로 신자 수 변화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시성식이 거행된 1984년에 근접한 연도와 30년이 흐른 최근 몇 년간을 비교해보면 극명한 대비가 관찰된다. 103위 성인 시성이 한국교회에 끼친 영향을 신자 수 변화 추이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하더라도 신자 수 변화는 가장 가시적이고 구체적인 결과물인 것은 틀림없다.

시성식이 열린 1984년을 보면 전체 인구 4040만여 명 대비 천주교 신자 비율은 약 4.6(184만여 명)이며 증가된 신자 수는 13만7109명이다. 신자 증가율은 8.0였다. 1985년에는 1년 동안 14만7429명이 천주교 신자가 됐다. 증가율은 역시 8.0를 기록했다. 이후 1986년에 15만2702명, 1987년에 16만3721명의 신자가 증가해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갔다. 1990년대를 전후해서는 신자 증가율이 둔화되기는 했지만 5 내외를 꾸준히 기록했다.

2011년 말 기준으로 신자 수는 530만9000여 명으로 전체 인구대비 신자비율이 10.3를 기록해 1984년의 4.6에 비하면 2.24배 증가한 수치다. 불교, 개신교 등 타 종단에 비하면 놀라운 증가세다. 그러나 2011년 1년 동안 증가한 신자 수는 10만4375명으로 증가율로는 2.0에 그쳤다. 2012년에는 8만4959명의 신자가 증가했고 증가율 1.6다. 2대 증가율마저 무너지고 말았다. 가장 최근인 2013년에는 8만1627명이 증가해 증가율 1.5로 지속적인 증가율 감소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형세다.

■ 양적 성장 걸맞는 ‘질적 성숙’ 실패

1984년 시성식 후 가파른 신자 수 증가는 물론 한국 성인명 세례명 쓰기, 본당 주보성인으로 한국 성인 모시기, 103위 성인 유적지의 성지 개발, 각 교구 교회사연구소 설립 등의 현상이 나타났다. 103위 성인은 한국교회 양적 성장의 강력한 추진체였다. 하지만 103위 성인 시성이 동인(動因)으로 작용했던 교회의 외형적, 양적 성장은 이제 한계에 다다랐음이 최근 몇 년간의 교세 통계에서 여실히 증명되고 있다.

한국교회사연구소 고문 조광(이냐시오) 교수는 신자 수 증감에 대해 “당시 도덕성의 위기 시대에 한국 천주교회가 쌓아온 도덕적 권위에 힘입은 부분도 있지만 시성식과 최초의 교황 방한도 중요 요인인 것이 사실”이라며 “현재의 신자 수 정체는 한국교회가 지난 30년간 일궈낸 양적 성장에 걸맞는 ‘질적 성숙’에 실패한 결과로 봐야 할 것”이라고 진단했다.

조광 교수는 시성식 후 일었던 순교성지 개발 붐에 대해서도 “‘개발시대’라는 한국적 풍토에 교회가 휩쓸려 교회의 자산과 인력을 대규모 건설 공사에 투입하면서 오히려 성지의 원형을 파괴하는 데 소비했다”고 비판했다. 조 교수는 이어 “103위 성인을 보유한 한국교회 신자들의 질적 성숙을 도모하려면 한국교회가 선교, 사목 방향에서 신자 교육과 자발적 참여 의지 고취에 소홀했음을 반성해야 한다”고 밝혔다.

5월 103위 성인 시성 30주년을 맞는 한국교회는 곧이어 8월에 있을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 시복식을 준비해야 한다. 124위 복자는 103위 성인과 또 다른 의미를 지닌다.

호남교회사연구소 명예소장 김진소 신부는 1831년 조선교구가 설정되면서 조선교구 사목을 책임진 파리외방전교회가 자신이 조선에 진출한 이후인 기해박해(1839년), 병오박해(1846년)와 병인박해(1866년) 순교자들에 대해서만 시복시성을 추진했다고 103위 성인 탄생의 시대적 배경을 설명했다. 103위 성인의 시성에는 1857년 이들이 가경자로 선포된 이후 무려 127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 과정에서 파리외방전교회는 한국의 순교자를 현양하는 데에 지대한 노력을 했다.

 
▲ 1984년 거행된 103위 성인 시성식 모습. 순교자의 시복과 시성은 현재를 사는 신자들의 신앙쇄신과 성숙을 위한 것이라는 인식 전환이 필요하다.
 
■ 한국교회 선구자 순교자 124위

그러나 103위 성인에 앞서 천주교를 이 땅에 받아들인 초기 순교자들은 엄격한 신분제 사회에서 예수의 매력에 끌려 신분을 초월한 형제애와 평등사상을 실천한 선구자였다. 신해박해(1791년), 신유박해(1801년)를 중심으로 순교한 124위의 시복이 한국교회의 의무로 남겨진 이유였고 이제 한국교회는 스스로의 힘으로 124위를 복자로 맞이하게 됐다.

주교회의 시복시성주교특별위원회 위원장 안명옥 주교(마산교구장)는 지난 2월 8일 교황청으로부터 순교자 124위의 시복 결정 소식이 전해진 후 “이번 시복 결정이 노력을 기울인 만큼 기쁘기도 하지만 순교자의 삶을 본받고 살아내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다”며 “시복식은 순교자들이 누리고 있는 영원한 생명을 공표하는 예식인 만큼 우리는 신앙을



가톨릭신문  2014-04-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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