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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이땅에 평화] 한 청년의 탈북 이야기

나는 살기 위해 1만㎞ 사선을 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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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북한의 국경을 넘은 김동철씨는 중국·라오스·태국을 거쳐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은 고층 빌딩과 인권이 존중받는 사회 분위기였다. 2년 6개월이 지난 지금 그의 눈에 비치는 세상은 어떨까. 이힘 기자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김동철(가명)씨는 목숨을 걸고 북한 국경을 넘었다. 수없이 죽을 고비를 넘기며 2011년 초겨울 남한에 도착했다. 하지만 20년 가까이 북한에서 산 그에게 한국사회에 적응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새 신발에 익숙해지기까지 계속 발이 까지는 것처럼 그는 오늘도 새로운 삶에 적응하기 위해 계속 노력을 하고 있다.

김씨가 탈북을 결심한 순간부터 한국에 들어와 적응해가고 있는 지난 5년간의 세월을 그의 시각에서 되짚어봤다. 탈북 동기와 북한의 현실, 한국 생활 적응에서 겪는 어려움, 탈북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대한민국의 모습을 재구성했다. 또 북한이탈주민을 위한 교회의 사도직 활동의 현황을 살피고 과제를 짚었다.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의 날 평화신문 커버스토리- 이땅에 평화에서다.



#살기 위해 선택한 범죄의 길

손바닥만한 창문 너머로 개 한 마리가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토실토실 살이 오른 셰퍼드가 보위부 직원들이 남긴 밥을 정신없이 먹어치웠다. 보리밥에 남은 반찬을 섞은 개밥이지만 감옥에서 먹는 밥에 비하면 훌륭해 보였다. ‘네가 나보다 낫구나.’ 동철(가명ㆍ당시 19세)은 매질로 잔뜩 부어오른 눈으로 창문 너머의 개를 바라보았다.

장사를 했다는 이유로 일주일 전 보위부 감옥에 들어온 그는 온몸이 멍투성이가 돼 있었다. 장사는 북한에서 비사회주의적인 행위이기에 국가의 허락을 받지 않으면 감옥에 끌려온다. 하지만 북한주민들은 불법을 하지 않고는 끼니를 이을 수가 없다. 한 달 월급 1500원으로는 쌀 500g도 사지 못한다. 많은 사람이 위험한 줄 알면서도 장사를 하는 이유다. 돈을 벌기 위해서다.

한 사람이 간신히 들어가는 독방에서 동철은 온종일 쪼그리고 앉은 채 20kg이 넘는 통을 등에 지고, 무릎 뒤쪽에는 각목을 끼고 있어야 했다. 간수들은 수시로 들어와 발로 동철의 무릎을 치며 신문했다. 같이 장사를 한 사람은 누구인지, 다른 물건은 팔지 않았는지 캐물었다. 통의 무게 때문에 아무리 발길질을 당해도 쓰러지지 않았다.

“종간나 새끼들. 밥 처먹어라!”

일주일이 지나고 동철은 일반수용소로 옮겨졌다. 이곳에서는 40명이 5열로 줄을 맞춰 쪼그리고 앉아 있어야 했다. 밥 먹을 때와 화장실을 갈 때만 움직일 수 있었다. 이마저도 간수의 기분이 안 좋을 때면 허락되지 않았다. 간수가 들고온 양동이 두 개에는 쌀보다 돌멩이가 더 많은 밥과 시큼한 냄새가 코를 찌르는 국이 담겨 있었다. 밖에 있는 개한테 줘도 안 먹을 정도였지만 살기 위해서는 먹을 수밖에 없었다.

▲ 김동철씨는 한국에 왔을 때 거리에 지나가는 수많은 인파를 보며 놀랐다고 한다. 이제는 서울 거리를 아무렇지 않게 지나다닐 정도로 복잡한 사회에 적응했지만, 가끔은 어렸을 때 살던 시골마을이 그립다. 김씨가 명동 거리에서 잠시 멈춰 생각에 빠져있다.
 
#지울 수 없는 ‘탈북자’ 꼬리표

동철은 2011년 8월 27일 두만강을 건넜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남한으로 가겠단 생각은 없었지만, 어디든 북한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래도 말 통하고, 한민족인 남한이 낫지 않겠나?”

보위부 감옥에서 나온 동철에게 평소 친하게 지내던 은식(가명)은 탈북을 하자고 했다. 북한에서 자란 동철에게 남한은 쳐부숴야 할 적국이었기에 처음엔 남한이 아니라 미국에 갈 생각이었다. 아버지가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가기 전까지 학교에 다녔던 동철은 남한이 무시무시한 나라라고 배운 기억이 났다. 수학문제 중에는 ‘남조선 괴뢰군 10명 중 7명을 죽이면 몇 명이 남나?’라는 질문이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국경을 넘자 남한은 북한에서 배운 그 나라가 아니었다. 북한을 넘어 중국, 라오스, 태국으로 이어지는 1만㎞의 대장정. 동철은 목숨을 건 사투 끝에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해 11월 29일, 동철은 한국에 도착했다.

하나원 생활을 마치고 동철은 평택의 휴대전화 조립 공장에 다니며 한국사회에 적응하기 위해 노력했다. 회사는 탈북자인 그를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회사에서 막내였던 동철은 아침 일찍 나와 사무실을 청소하곤 했다. 평소 말을 잘 섞지 않던 차장이 어느날 아침 동철을 불렀다.

“김정은한테나 있지, 여기는 왜 왔냐?”

그의 목소리에서 평소 동철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왔음이 느껴졌다. 차장에게 피해 준 일은 조금도 없는 동철이었다.

“무슨 상관입니까?” 화가 난 동철이 되받아쳤다. 차장은 기가 막힌다는 듯 혀를 차더니 “이래서 빨갱이들은 거두면 안 된단 말이야”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북한에서 왔다는 이유만으로 무시를 당한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었다. 동철은 앞으로 다시는 북한에서 온 것을 밝히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한국의 경쟁 속에서 숨 막혀

19살에 한국에 들어온 동철씨는 다른 친구들처럼 검정고시를 준비했다. 북한에서 11살까지 학교에 다녔기에 연필을 잡은 건 8년 만이었다. 어려운 환경에서도 꿋꿋하게 살아온 그였지만 공부를 시작하면서 심한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다. 경쟁해본 게 난생처음이었기 때문이다.

북한과 남한의 교육 격차보다도 서로 경계하고 경쟁하는 분위기가 그를 의기소침하게 했다. 누구를 만나든 상대방은 마음을 열지 않고 경계부터 하곤 했다. 남들보다 잘해야 하고, 그보다 못하면 패배자 취급을 받는 한국 문화는 동철씨를 작아지게 했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았어도 정이 많고 서로 도우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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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4-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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