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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민주일] 가족농 사랑기금, 가톨릭 농민의 새 희망으로 떠오르다

‘가족농 사랑기금’으로 ‘희망’ 수확하는 강원도 양구군 이준기씨 농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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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농 사랑기금 덕분에 다시 농사를 짓게 된 이준기씨가 자신의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며 미소를 짓고 있다. 그는 사랑기금이 구세주였다고 말했다.


▲ 서울대교구 동작동본당 신자들이 이준기씨 고추밭에서 고추를 따며 즐거워하고 있다.

▲ 이준기씨가 9일 수확한 오이맛고추를 담은 상자를 수레에 실어 나르고 있다.
 
‘가족농 사랑기금’이 농촌에 새로운 희망으로 떠올랐다. 가족농 사랑기금은 서울대교구 우리농촌살리기운동본부(본부장 조해붕 신부)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는 가톨릭농민회 농가에 농사 시작자금(500만 원)을 무담보로 빌려주는 제도. 도시 신자들이 맡긴 성금을 농촌 신자에게 빌려주는 ‘도ㆍ농 상생의 새 모델’이라 할 수 있다.

2009년 세 농가 지원으로 시작한 가족농 사랑기금이 시행 여섯 해째를 맞아 ‘희망’을 수확하기 시작했다. 농사를 짓다 빚을 져 농사를 포기했던 경험이 있는 농민 이준기(베드로, 58, 춘천교구 해안본당)씨를 9일 만났다. 그는 2009년 지원받은 사랑기금 덕분에 농사꾼으로 재기할 수 있었다. 그의 농장이 있는 강원도 양구군 동면 팔랑2리 비닐하우스 안에는 양구 특산물인 곰취와 오이맛 고추가 초록색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그의 밭에 찾아온 서울 아줌마들

이씨 집에서 차로 1분, 걸어서 5분쯤 떨어진 곳에 대형 비닐하우스 8동이 눈에 띄었다. 이 중에 4동은 곰취밭이고, 다른 4동은 고추밭이다. 정오가 조금 지나 아내 이옥희(마리아, 48)씨 전화를 받고 성급히 고추밭으로 달려간 그는 아내와 처제가 오전 내내 수확해 10㎏들이 상자에 담은 고추를 자신의 파란색 1톤 트럭에 실었다. 이날 수확한 고추는 20상자로, 근처 농협에 납품할 고추들이다.

그가 무농약으로 재배한 고추는 화학비료도 쓰지 않아 따자마자 바로 먹을 수 있고, 씹을수록 단맛이 나는 것이 특징이다. 20분 남짓 일했는데도 무더위 때문인지 얼굴 전체가 땀방울로 가득했다.

농협에 납품을 다녀오니 5~6명 아줌마부대가 수녀들과 함께 그를 찾아왔다. 서울 동작동본당 신자들이 수도자들과 나들이를 나왔다가 오이맛고추를 얻어 가려 불쑥 찾아온 것이다. 동작동본당 신자들은 이씨네 곰취를 성당에서 단체로 구매했던 적이 있어 아는 사이였다. 신자들은 공짜로 얻어 더(?) 맛있는 고추를 깨물며 즐거운 표정들이다. 신자들은 “맛이 좋아 집에 가서 단체로 주문할 예정”이라며 웃음을 지었다. 땀이 흘러내린 이씨 입가 역시 싱글벙글했다.



재기 희망 선물한 가족농 사랑기금

그는 6년 전 파산했다. 15살 때부터 농사를 지어온 베테랑 농사꾼이었지만, 버섯 농사는 수확해도 남는 게 없었고, 설비 투자비 때문에 갈수록 빚만 늘었다.

“정말 힘들었어요. 부부가 모두 신용불량자가 됐지요. 농사꾼은 수확을 해야 다시 농사지을 희망을 갖는데, 몇 년간 수확이 거의 없었지요. 눈앞이 캄캄했어요. 그때 사랑기금이 구세주였습니다.”

은행은 물론, 지인과 친척 등 빌릴 수 있는 모든 곳에서 돈을 빌린 상황이었기에 당시 이씨는 1000원짜리 한 장 빌릴 수 없었다. 가족농 사랑기금 500만 원은 삶의 희망이 됐다. 그는 “농사는 시작할 때 가장 많은 돈이 드는데, 가장 필요한 때 목돈을 지원받아 지금까지 버티고 있다”며 고마워했다.

그의 농사 인생 이야기를 들으니, 농업 특히 하느님 창조질서를 지키는 유기농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가슴에 와 닿았다. 제초제 한 번 뿌리면 될 것을 일일이 손으로 김을 매야 하고, 화학 농약 대신 천연 농약을 치니 값도 비싸지만 두세 번 쳐도 병충해 예방 효과는 미미했다. 가장 큰 문제는 몇 배나 땀을 쏟아 수확하더라도 도시 신자들이 사주지 않으면 판로가 막히는 것이다.

그는 “수확해도 팔리지 않으면 한 해 농사는 허망하게 끝난다”며 “그러면 이듬해 다시 빚을 내 농사를 시작하는 수밖에 없는 게 우리 가톨릭 농민의 현실”이라고 고개를 떨궜다.



심마니가 생명의 농사꾼이 되기까지

삼중고(三重苦) 속에서도 그가 유기농 농사를 고집하는 이유는 인생을 살아오며 겪은 체험 덕분이다. 그는 6ㆍ25전쟁 직후 강원도 홍천에서 태어났다. 전후 지뢰밭을 전전하며 포탄 파편 등 고철을 캐야 겨우 입에 풀칠할 수 있었다.

15살 때부터 심마니로 지내며 귀동냥으로 얻은 지식으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그러다 1979년 농약을 뿌리다 중독돼 농사를 포기해야 했다. 몸을 추스르고 경기도의 한 가구공장에 들어가 일하면서 분진과 약품 냄새를 견디다 못해 1년여 만에 강원도로 돌아왔다. 그때 생명의 농사인 유기농 농사를 짓자고 결심했다.

“2000년 백혈병에 걸렸을 때도 4년 동안 농사를 짓지 못



가톨릭평화신문  2014-0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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