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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레길 신앙길] 10. 옛 철길 따라 걷는 의정부교구 마재성지

초대교회 순교정신 깃든 ‘약속의 땅’, 정약용·성 정하상 등 조선교회 창립주역 고향, 천주실의 읽으며 신앙 고백했던 상징 곳곳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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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정 / 팔당역 옛 철길-마재성지-약종동산-새소리명당길-다산유적지-마재성지-운길산 역 옛 철길(3시간 30분 소요)



“한 처음에 하느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셨다. 땅은 아직 꼴을 갖추지 못하고 비어 있었는데, 어둠이 심연을 덮고 하느님의 영이 그 물위를 감돌고 있었다(창세 1,1~2).”

천지창조의 순간 하늘과 땅이 갈라지기 전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던 거룩한 물 위처럼, 이 땅 위에도 거룩한 하느님의 영이 감돌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조선 후기 최초로 천주에 대한 신앙을 믿고 받아들였던 한국 천주교의 요람 마재성지다. 정약종, 정약용, 정약전, 정약현 등 나주 정씨 집안 형제들이 천주실의를 읽으며 거룩한 부르심에 답했던 한국 천주교 신앙 못자리 마재성지를 찾았다.


 
▲ 마재성지 전경
 


▶ 거룩한 부르심의 땅 마재

팔당역에서 옛 철길을 따라 50분가량 걸으면 경기도 남양주시 조안면에 자리잡고 있는 마재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한국교회가 창설된 1784년 이전부터 하느님의 숨결이 닿아있던 한국 천주교 신앙 못자리다. 성 정하상(바오로), 성녀 정정혜(엘리사벳) 남매의 탄생지이자, 정약전, 정약종(아우구스티노), 정약용(세례자 요한) 형제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에서 처음으로 천주실의 등 서학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다.

한국교회 초대 신앙 선조들이 한역 서학서를 읽고 공부하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받아들이고 고백했던 이곳 마재마을에 한옥 성전이 들어선 것은 2007년이다. 한강변 양지바른 땅에 들어선 한옥 성전 현판에는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 성인의 신앙고백이 붙어있다. 보이지 않는 주님에 대한 모든 의심을 넘어, 보지 않고도 천주를 믿었던 나주 정씨 일가들의 행복한 신앙 고백을 상징하고 있다.

한옥 성전 안에는 은총 십자나무가 마련돼 있다. 도보 순례를 시작하기 전 이 곳 성전에 들러 묵상한 후 색종이에 기도지향을 적어 은총 십자나무에 봉헌할 수 있다. 월요일을 제외한 화요일~주일 오전 11시 봉헌되고 있는 미사에 참례해도 좋다. 한옥 성전 바로 앞은 약종동산이다. 경사 20도쯤의 야트막한 언덕 위에는 십자가의 길과 칼 십자가, 성모상과 마리아 십자가 등이 마련돼 있다. 겟세마니 동산과 골고타 언덕을 연상케 하는 약종동산에서 가장 인상적인 곳은 칼 십자가 앞이다. 옛 신앙 선조들이 고초를 겪었던 칼 모양의 십자가 형상 앞에 서면 둥근 금빛 거울 위로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다. 내 안에 있는 예수 그리스도와 마주치는 순간이다.


 
▲ 마재성지 한옥성전 내 위치한 은총십자나무
 


 
▲ 마재성지 약종동산 칼 십자가.
칼 십자가 위에는 순례객의 기도가 담긴 십자가가 봉헌돼 있다.
 


▶ 하느님 영이 감도는 물가

마재성지 한옥 성전과 약종동산에서 기도와 묵상을 마친 후 물가로 향한다. 마재성지에서 나와 오른쪽으로 난 마을길을 따라 가면 한강변이 나온다. ‘다산길’이라 이름 붙은, 고요한 물길이 잔잔히 흐르는 강변길을 따라 걸으며 한국 땅에 처음으로 신앙이 움트던 당시 상황을 상상해본다. 서학이라는 낯선 학문과 ‘천주’라는 낯선 이름을 받아들이고 증거했던 그들의 선택과 용기 덕분에 지금 우리도 하느님을 알게 됐다는 감사함과 감격이 강바람과 함께 밀려든다.

30분쯤 걸었을까. 산길이다. 이 산길이 끝나는 곳에 다시 마을이 나타난다. 정약용 실학박물관과 여유당, 정약용 묘 등이 있는 다산 유적지가 있는 마을이다. 마재성지에서 강변길을 따라 걸으면 50분 남짓 걸리는 곳에 위치한 이곳 다산 유적지에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천상 이름을 가진 다산 정약용의 흔적이 남겨져 있다.

형제들과 함께 천주실의를 읽었고, 1784년 마재를 방문한 이벽과 배를 타고 상경하며 천주학에 대해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던 다산은 천주를 배웠고 알았다는 이유로 많은 것을 잃어야 했다. 1801년 2월 책롱사건으로 투옥됐고, 경상도 장기로 유배됐으며, 그 해 10월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압송돼 조사받은 후 11월 강진으로 떠나는 등 18년간 유배생활을 해야 했다.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에 “이벽을 따라 노닐면서 서교의 교리를 듣고 서교의 서적을 보았다. 정미년 이후 4~5년 동안 자못 마음을 기울였는데…”라고 스스로 기록할 만큼, 천주교는 다산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 때문일까. 다산유적지 곳곳이 마치 마재성지의 한 부



가톨릭신문  2011-0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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