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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간 84주년 특집] 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Ⅱ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교우촌의 역사·설립 의미

함께 살고 함께 성화되는 ‘소공동체 전형’. 박해 계기로 전국에 교우촌 형성·신앙 전파, 모범적 신자 활동 돋보이는 ‘본당 설립 원형’, 당시 신앙 연구로 현대 영성 체계 마련 시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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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은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여러분에게 명한 것을 모두 다 지키도록 그들을 가르치시오”(마태 28,19-20). 예수 그리스도께서 직접 남기신, 신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소명이다.

우리나라의 복음화율은 지속적인 성장세를 이뤄, 2009년 말 현재 총인구 대비 총신자 비율 10를 넘어섰다. 이러한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바로 본당을 꼽을 수 있다. 본당은 각 지역사회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실현하는 구심점이 되어 왔다.

본당 수도 전국적으로 꾸준히 증가해왔다. 현재 한국교회 본당 수는 1600여 개에 이른다(2009년 말 1571개). 각 본당들이 관할하는 공소도 1000여 개를 넘어선다. 1800년대 들어 선교사들이 본격적인 활동을 시작할 때와 비교하면 괄목할 만한 성장이다. 이러한 성장의 역사를 되짚어보면 초기 신자공동체와 교우촌에서부터 든든한 신앙이 이어져왔음을 알 수 있다.

특히 한국교회 본당 설립 역사는 외국 교회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특징을 드러낸다. 바로 사제가 파견되기도 전에 먼저 신자들이 자발적으로 공동체와 교우촌 등을 설립, 운영해왔다는 점이다. 현재까지 전국 각 교구 관할 지역사회 복음화를 이끈 많은 본당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이뤄진 교우촌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외국인 선교사들이 한국에 들어와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고 교회 조직을 세워나가는데 있어서도 교우촌은 든든한 디딤돌이 됐다.

전국 각 지역사회 복음화의 산실인 본당의 역사와 의미, 현재 등을 되짚어보며, 우선 본당 설립의 원형인 초기 신앙공동체, 특히 교우촌의 역사와 설립 의미 등에 대해 살펴본다.

# 교우촌의 역사

한국교회는 1784년 이승훈이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공동체를 형성한 것을 교회 창설로 보고 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학자들을 중심으로 교리에 대한 연구가 활기를 띠고 신앙이 열매를 맺음에 따라 외적 선교에 힘쓰는 공동체들이 하나둘씩 생겨나기 시작했다. 특히 ‘교우촌’은 가톨릭 신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중요한 촉매 역할을 했다.

교회사 전문가들은 박해가 전국적인 양상으로 번져나간 신유박해를 계기로 교우촌이 시작됐다고 전한다. 교우촌이 활성화될 수 있었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이 박해라는 것이다. 신유박해 이전, 가톨릭 신앙은 몇몇 지역에 한정돼 싹을 틔웠지만, 박해 후 전국적으로 교우촌이 생겨나면서 가톨릭 신앙 또한 널리 전파됐다.

박해가 본격화되자 신자들은 고향을 등지고 전국 각지로 흩어져야 했다. 자연스레 신자들은 삼삼오오 모여살기 시작했고, 이들은 함께 생활하며 신앙생활을 이어나갔다. 신자임을 감추기 위해 외교인들과 어울려 살진 못했지만 잦은 묵상과 나눔을 실천하며 사제 영입과 성사의 열망을 이어가는 삶이었다. 이러한 교우촌 신자들의 삶과 행위는 살아있는 복음을 전파했고, 갓 세례를 받은 신자들의 신앙적 모범이 됐다.

1830년대 한국에 발을 디딘 외국인 선교사들도 이 교우촌을 근간으로 본격적인 선교활동에 나설 수 있었다. 당시 교우촌의 수와 지역적 분포 상황은 명확하게 알려지지 않았다. 교우촌 자체가 ‘숨어 살았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국 각 지역마다 수십에서 수백 개가 자리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교우촌과 공소는 성사를 집행하고 교회 조직을 세워가는 배경으로 중요성을 더했다. 나아가 교우촌 회장과 공소 회장 등의 역할도 더욱 묵직해졌다. 흩어진 교우들을 결속시키고 교회 소식을 알리는 등 신앙생활을 이끌어갈 대표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외국인 선교사들도 지역 신앙공동체의 중요성을 강조, 박해로 무너져버린 교우촌과 공소를 다시 세우는데 역점을 뒀다. 입국 후엔 대부분 곧바로 전국을 순방하며 각지에 회장을 임명하고 승인하는데 큰 힘을 기울였다. 1876년 입국한 블랑 신부도 한국에 자리를 잡자마자 서울 안팎에 공소를 세우고, 새 공소 회장들을 선임하는데 가장 먼저 나섰다.


 
▲ 수리산 옛 교우촌 모습.
현재 안양시 만안구 안양9동 소재로, 수원교구 중앙본당 관할구역에 있는 이곳은 기해박해(1839년) 이후 최경환 성인을 비롯한 교우들이 들어와 신앙 공동체를 이뤘던 오래된 교우촌이다.
현재는 터만 남아 있는 상태다.
 


# 교우촌 운영 의미

1831년 조선교회는 중국 북경교구 관할에서 벗어나 교황대리감목구로 지정되지만, 이후 수십 년간 이어진 박해로 본당을 설립하는 일은 여전히 요원했다. 이러한 때 교우촌의 역할과 운영은 한국교회사 안에서 더욱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교회사 전문가들은 이른바 ‘교우촌 영성’에 대해 신앙인들의 일생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육화론적 영성이라고 그 중요성을 강조한다.

교우촌은 공동체 생활을 기반으로 활발한 선교활동과 엄격한 교리교육을 펼치며 평신도 사도직을 구체적으로 실현한 공동체였다. 실제 사제가 없던 시절, 교회 확장과 재건의 바탕이 된 것은 교우촌이었고, 각 가정공동체를 보호한 것도 교우촌이었다. 나아가 교우촌 신앙인들의 선교활동과 삶의 실천은 신앙의 큰 귀감이 된다. 특히 교회사 전문가들은 교우촌은 그 자체로 ‘함께 생활하고 함께 성화되고 함께 선교하는’ 소공동체의 전형을 보여주고 있다고 강조한다. 하느님 앞에서 모든 이들이 평등함을 삶 안에서 드러내 보인 공동체였던 것이다.

초대 전동본당 주임이었던 보두네 신부도 편지(1889년 4월)를 통해 “… 그 중에서 뛰어난 미덕은 그들 서로가 사랑과 정성을 베푸는 일입니다. 현세의 재물이 궁핍하지만, 사람이나 신분의 차별없이 조금 있는 재물을 가지고도 서로 나누며 살아갑니다. 공소를 돌아보노라면 마치 제가 초대교회에 와 있는 듯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그때의 신도들은 자기의 전 재산을 사도들에게 바치고 예수 그리스도의 청빈과 형제적인 애찬을 함께 나누는 것 외에는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바라지 않습니다. 이곳의 예비 신자들도 선배 형제들의 표양을 본받고 있습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러나 한국교회 본당 설립의 원형으로 평가받는 교우촌에 대한 영성적인 접근과 심층적 연구는 크게 부족하다는 목소리도 높다. 그동안 교우촌과 관련해서는 역사와 생활형태 등에 대한 연구만이 일부 진행돼왔을 뿐이다. 도시화와 고령화 등의 영향으로 전통적인 교우촌이 급속도로 사라지고 있는 추세 안에서 교우촌의 역사와 신앙생활 등을 연구해 영성적인 체계를 세우는 것 또한 현재 한국교회에 주어진 시급한 과제로 지적된다.



가톨릭신문  2011-0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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