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본당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자면 ‘최초’, ‘최고’ 등의 수식어가 연이어 나열된다.
특히 성당은 한국의 첫 신앙공동체로 알려진 명례방 집회가 있었던 터에 세워져, 가톨릭신앙 구현의 중심지로 깊은 뿌리를 내려왔다. 교회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장소로서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공간으로 평가받는다.
이 땅에 가톨릭신앙이 전파된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명동본당. 21세기 건전한 교회 문화와 새로운 복음화의 중심지로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명동본당의 역사와 역할 등을 짚어본다.
■ 한국교회 복음화 산실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인 블랑 주교는 옛 명례방 터(종현 일대, 현 명동)에 성당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자리에는 종현서당을 설립, 예비신학생 양성부터 시작했다.
블랑 주교는 이곳 명동을 주교좌성당과 주교관, 신학교, 일반학교, 고아원, 인쇄소 등으로 구성된 한국교회의 중심지로 가꾸고자 했다. 성당은 1898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초기 종현으로 불리던 본당 명칭은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명동본당으로 변경됐다.
1870년대 후반 병인박해로 인해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움직인 이들도 명동 인근을 떠나지 않았던 신자들이었다. 이곳 신자들은 전국 신자들과 공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명동 인근은 한국교회의 중심지로 틀을 갖추게 된다. 전국 모든 본당들의 모(母)본당으로 사목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던 명동본당은 성당을 완공하기도 전인 1892년에 이미 약현(현 중림동)본당을, 1927년에는 백동(현 혜화동)본당을 각각 분가시키기도 했다.
해방 후 임시적 분단 상황에서도 가톨릭교회 재건의 주요한 역할을 한 공동체도 바로 명동이다. 성당은 남한 지역 교회를 위한 새 사제들을 탄생시키는 요람이기도 했다. 현재 명동본당의 교적상 신자 수는 2만여 명이며 매월 예비신자들을 위한 세례식이 거행된다.
▲ 명동성당의 옛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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