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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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서울 명동본당

교회사·선교·교육·복지문화 …, 한국교회 ‘새 복음화’ 1번지, ‘전국 본당들의 어머니’ 사목안내자 역할, 교육·사회복지 구심점으로 새 비전 제시, ‘민주화 성지’로 예언자적 역할 구현 앞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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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교회의 상징 서울 명동주교좌성당.
교회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장소로서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공간으로 평가받고 있다.
 

명동본당에 대한 소개를 시작하자면 ‘최초’, ‘최고’ 등의 수식어가 연이어 나열된다.

특히 성당은 한국의 첫 신앙공동체로 알려진 명례방 집회가 있었던 터에 세워져, 가톨릭신앙 구현의 중심지로 깊은 뿌리를 내려왔다. 교회사와 한국 근현대사를 품고 있는 역사적·사회적 장소로서 뿐 아니라, 예술적으로도 높은 가치를 지닌 문화공간으로 평가받는다.

이 땅에 가톨릭신앙이 전파된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이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역동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는 명동본당. 21세기 건전한 교회 문화와 새로운 복음화의 중심지로서 기대를 모으고 있는 명동본당의 역사와 역할 등을 짚어본다.



■ 한국교회 복음화 산실

1882년 한미 수호조약이 체결되자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인 블랑 주교는 옛 명례방 터(종현 일대, 현 명동)에 성당을 세우기 위해 땅을 매입하기 시작했다. 우선 이 자리에는 종현서당을 설립, 예비신학생 양성부터 시작했다.

블랑 주교는 이곳 명동을 주교좌성당과 주교관, 신학교, 일반학교, 고아원, 인쇄소 등으로 구성된 한국교회의 중심지로 가꾸고자 했다. 성당은 1898년 ‘원죄없이 잉태되신 복되신 동정 마리아’에게 봉헌됐다. 초기 종현으로 불리던 본당 명칭은 1945년 광복을 기점으로 명동본당으로 변경됐다.

1870년대 후반 병인박해로 인해 폐허가 된 조선교회를 재건하기 위해 움직인 이들도 명동 인근을 떠나지 않았던 신자들이었다. 이곳 신자들은 전국 신자들과 공소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담당했고, 이후 신앙의 자유가 선포되면서 명동 인근은 한국교회의 중심지로 틀을 갖추게 된다. 전국 모든 본당들의 모(母)본당으로 사목의 안내자 역할을 해왔던 명동본당은 성당을 완공하기도 전인 1892년에 이미 약현(현 중림동)본당을, 1927년에는 백동(현 혜화동)본당을 각각 분가시키기도 했다.

해방 후 임시적 분단 상황에서도 가톨릭교회 재건의 주요한 역할을 한 공동체도 바로 명동이다. 성당은 남한 지역 교회를 위한 새 사제들을 탄생시키는 요람이기도 했다. 현재 명동본당의 교적상 신자 수는 2만여 명이며 매월 예비신자들을 위한 세례식이 거행된다.


 
▲ 명동성당의 옛 모습.
 
 
■ 교회사목의 대표 역할

지리적인 면만이 아니라 사목에 관한 제반 여건에 있어서도 명동본당은 ‘초본당적으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 명동본당의 사목방침 또한 전국 각 본당의 사목 방향을 제시하는 기준이 되어왔다. 1900년대 전후로 전국 각 지역에서는 명동을 모형으로 사제관과 성당을 신축하고 부속 건물로 고아원과 학교를 지어나가며 선교활동을 펼쳤다. 이어 일제 치하에 들어서자 명동본당은 교육과 사회복지의 구심점으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하며 교회사목을 선도했다.

1924년 무의탁 노인들을 돌보기 위해 발족된 본당 애긍회는 교회의 사회봉사 활동을 보다 폭넓게 확대하는 구심점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 설립된 본당 청년회와 성모자비회 활동은 한국 평신도 활동의 표상으로 꼽힌다.

또한 해방 후 창립된 전국 혹은 교구 수준의 사도직단체 중 상당수도 명동성당에 본부를 마련했으며, 성모병원(현 가톨릭회관)도 명동성당 아래에 자리잡으며 명동일대는 한국사회 전반의 관심을 모았다.

교육활동에서도 명동본당은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1946년 처음 시작된 본당의 가톨릭교리강좌는 큰 인기를 모았고, 해마다 여는 사순절 특강도 오늘날까지 범교구적인 관심과 참여 속에 진행되고 있다.

■ 사회·문화사목 중심으로 부상

명동본당과 성당 건물은 애덕 실천과 복지사업, 출판, 문화, 의료사업, 사회정의를 세우고 인권을 실현하는 등 보다 넓은 의미의 복음선포 구심점으로 평가받는다.

한국 근대 건축사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최초로 세워진 고딕 양식 건축물인 명동성당은 사적 제258호로 지정됐다. 이 성당 내에 기도서와 교리책 제작을 위한 성서활판소가 설치된 것은 이미 1880년대로 알려진다. 특히 1947년에는 본당 신자들만의 힘으로 ‘종현가톨릭출판사’를 설립, 오늘날까지 이어져오고 있다.

1924년에는 한국 최초로 파이프오르간이 설치됐다. 이어 성당 내에 문화관이 들어선 것은 1939년이었다. 같은 해 본당은 가톨릭합창단을 창단, 교회음악을 통한 문화적 토양을 넓히는데 힘썼다.

1960년대 교회는 제2차 바티칸공의회의 사회적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사회·정치 참여에 활발한 태도를 보였다. 이 당시 활동했던 중심 인물들의 대다수가 명동본당에서 배출되기도 했다. 이어 1970년대 들어서 명동성당은 교회가 예언자적 역할을 구현하는 중심 무대로 이용되며, 민주화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1990년대 들어 정치사회가 안정화되면서 명동본당은 문화에 대한 관심과 문화적 생활을 위한 사목적 배려에도 아낌없는 힘을 실었다. 다양한 문화공연을 위한 공



가톨릭신문  2011-0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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