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4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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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구 계산본당

시대 변화 발맞춰 쇄신·발전, 지역 복음화 중심으로 ‘우뚝’, 박해 피해 경상도 모여든 신자 중심으로 설립, 사회 활동 적극 참여하며 지역민에 신앙 전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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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대교구 복음화 활동의 중심지 계산본당.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아 계산본당은 120여 년 동안 이어온 신앙을 바탕으로 ‘새 시대 새 복음화’에 전념하고 있다.
 

지독했던 조선후기의 천주교 박해는 신앙공동체를 더욱 더 단단하게 하는 계기가 됐다.

영남 지역은 박해를 피해 전국 각지에서 신자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 중심에 있던 대구본당(현 대구 계산본당)은 특히 영남을 넘어 호남 지역까지 선교사를 파견하고 신자들을 돌보는 신앙의 못자리로 교회사의 한 축을 세워왔다. 올해 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한 대구대교구의 주교좌본당으로서, 21세기 새로운 복음화의 구심점으로 서 있는 계산본당의 뿌리를 들여다본다.



■ 영남지역 신앙 교두보

1801년 신유박해 전후로 한국교회는 박해라는 무시무시한 고난에 처해 있었다. 많은 신자들이 순교하고 유배를 떠나던 때, 전국에서 피난 온 수많은 신자들은 청송 모래산, 문경 여우목 등 골짜기를 찾아 숨어서 신앙생활을 했다. 1886년 조선교구 제7대 교구장 블랑 주교는 박해를 피해 영남지역에서 숨어 신앙을 증거하던 많은 신자들을 위해 경상도 최초의 본당 ‘대구본당’의 설립을 인가하고, 충청도·경상도 지역을 사목하던 김보록(바오로) 신부를 초대 주임신부로 임명했다.

김보록 신부는 1886년 당시 박해의 여파가 남은 대구에서는 선교활동이 어렵다고 판단, 1830년대부터 충청도에서 피난 온 신자들이 모여 살던 ‘신나무골’에 임시 본당을 마련했다. 그 후 김 신부는 은신하며 사목하다가 ‘새방골’, ‘대어벌’을 거쳐 지금의 대구시 중구 계산동에 부지를 매입했다.

대구에 처음 세워진 성당은 1897년 전통적인 한식 목조에 팔각 기와지붕을 이은 십자형 성당이었다. 그러나 1901년 사고로 성당이 소실되자 김보록 신부는 두 번째 성당을 건립하기 위해 본당 신자들의 협력을 구했다. 마침내 1903년, 서양 고딕식으로 선보인 대구성당은 제8대 조선교구장 뮈텔 주교 주례로 축복식을 가졌다.

당시 대구성당은 서울과 평양에 이어 세 번째로 세워진 고딕 양식 건물이었으며, 지금도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지난 1981년 대한민국 사적 제290호로 지정, 보호되고 있다.

김보록 신부는 이후 경상도 전역을 두루 다니며 교우촌을 방문, 고해성사를 주고 세례를 베풀었다. 김 신부의 방문과 성사집행은 대구본당 신자들과 지역 신자들이 선교에 혼신을 다할 수 있도록 힘을 불어넣었다. 그렇게 열성적인 시기를 보내는 동안 한국교회도 많은 발전을 한다. 특히 1911년 조선대목구가 서울과 대구로 분리되면서 대구본당은 주교좌본당으로 승격됐다. 그 후 교구 설정 이전과 구별하기 위해 대구본당은 계산본당으로 이름을 변경한다.

■ 새로운 성장 모색

이름만 바뀐 게 아니었다. 사목활동에 임하는 본당 신자들의 태도 또한 더욱 활발해졌다.

계산본당 신자들은 우선 명도회를 창립, 명도회관을 건립하고 해성체육단(청년회)을 발족했다. 인애회·친애회·연령회 등도 활발한 활동을 펼치며 교육 분야에서 큰 역할을 담당했다. 그 중 해성청년회와 명도회는 1924년 ‘조선 남방 천주 공교 청년회’로 통합 발족, 지역 평신도들의 중심단체로 우뚝 서게 된다. 특히 1927년에는 ‘천주교회보’(현 가톨릭신문의 전신)를 창간, 교회 언론의 시작을 알리며 복음화에 힘을 실었다.

나아가 본당 신자들은 높은 시민의식과 평신도 소명을 바탕으로 3·1운동 참여와 신사참배 거부 운동 등 사회적 활동에도 능동적으로 동참한다. 서상돈(아우구스티노)과 신자들은 국채보상운동에 참여, 국권회복을 위해 열성을 다하고 애국계몽운동을 펼쳐 교회뿐 아니라 한국사회 전반에도 발자취를 남겼다.

아울러 1930년대에는 순교자 현양운동과 꾸준한 전교활동이 주목할만하다. 그 후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으면서도 계산본당 공동체는 힘을 잃지 않고 더욱 새로운 성장을 모색한다. 기존의 평신도 단체 조직을 강화하고 새로운 단체를 설립해 지역민들에게 하느님을 알리며 모범적인 삶을 살고자 노력했다.

대구 시내 중심지에 위치한 계산주교좌성당은 인근에 관덕정순교자기념관과 성모당, 대구대교구청 등을 잇는 신앙의 요충지로 자리하고 있다.

특히 계산본당은 대구대교구 설정 100주년을 맞이해, 120여 년 동안 이어온 신앙을 바탕으로 새 복음화에 전념하고 있다. 교구 설정 100주년을 기념해 전개해온 영성운동과 기념사업, 나눔 운동을 지속하는 가운데 100주년 기념행사들에 적극 참여하고, 하느님의 가르침인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는 한 해로 채워갈 계획이다. 더불어 본당의 모든 신심단체들이 서로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를 위한 사랑의 친교를 나눔으로써 서로 간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 1935년 당시의 계산주교좌성당과 주변 모습.
 

 
박원희 기자 (sunny@catime.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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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신문  2011-0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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