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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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복음화의 구심점, 본당 - 대구대교구 가실본당

영남 서북부 지역 본당의 모태/ 낙동강 뱃길 통해 광범위한 지역 선교 펼쳐/ 100년 넘은 교적부터 각종 유물 보존·전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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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서남부에 위치한 칠곡군 왜관읍 낙산리. 이곳을 지나는 영남의 젖줄 낙동강. 결코 멈추는 법 없이 유구한 세월을 유유히 흘러왔을 저 강물처럼 묵묵히 100년을 훌쩍 넘긴 세월의 흔적을 고스란히 담고 있는 곳이 있다. 바로 대구대교구 가실본당이다.

낙동강 나루터를 끼고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붉은색 신 로마네스크양식 성당. 유명한 독일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의 스테인드글라스 작품과 칠보로 만든 감실, 1924년 이전에 프랑스에서 제작된 한국에 하나뿐인 안나상 등 다양한 성물들도 오랜 역사만큼이나 풍부한 볼거리와 묵상거리를 제공한다.

110여년 전 이곳에 믿음의 터를 연 가실본당은 오랜 세월 굳건한 믿음의 역사를 간직한 채 고색창연한 아름다움으로 그 자태를 뽐내고 있다. 민족의 역사와 함께 부침을 거듭해온 가실본당의 자취를 더듬어 본다.


 
▲ 낙동강 나루터를 끼고 언덕 위에 우뚝 솟은 붉은색 신 로마네스크양식의 가실성당 전경.
 

대구대교구 가실본당(주임 황동환 신부, 성 베네딕도회 왜관수도원)은 1895년 6월 대구본당(현 계산주교좌본당)에 이어 교구에서 두 번째로 설립된 유서 깊은 본당이다. 낙동강변의 가실은 수상교통의 요충지로 멀리 부산, 대구, 상주, 안동 등과 서로 왕래하며 쌀을 실은 배와 생선과 소금을 실은 배가 많이 드나들었다고 한다.

설립 당시 본당은 북부와 동부 지역 일부를 제외한 경북 전체와 경남 거창, 충북 괴산, 단양, 황간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공소를 관장했다. 그만큼 가실은 낙동강 뱃길을 이용해 사목활동을 펼칠 수 있는 좋은 위치였다.

초대주임 하경조(Camille Pailhasse, 파리외방전교회) 신부는 이곳 가실에 본당을 세우고 수많은 공소들을 순회하며 선교에 힘썼다. 본당은 이후 성주, 선산, 문경, 상주, 함창, 군위, 안동, 예천, 의성, 김천, 거창 등 경상도 북서부 일대와 충청도 황간, 전라도 무주를 아우르는 선교활동을 펼쳤고, 교세가 급격히 확장됐다. 덕분에 가실본당은 발전을 거듭해 본당 설립 6년 만인 1901년 김천(현 김천 황금본당)본당을 분가시켰고, 1922년 퇴강, 1928년 왜관본당 등을 설립·분가시키며 영남 서북부 지역 수많은 본당의 모태가 됐다.

1922~1924년 지어진 현재의 성당은 신 로마네스크식 벽돌조 건물로, 설계는 명동성당과 대구 계산성당 등을 지은 파리외방전교회 박도행(Victor Louis Poisnel) 신부가 담당했다. 박 신부는 벽돌을 일일이 확인하며 잘 구워진 벽돌은 성당을 짓는 데 썼고, 중간치는 사제관을 짓는 데, 품질이 나쁜 것은 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인지 벽돌 하나하나에도 정성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듯하다. 현재 성당과 구 사제관은 경상북도 첫 벽돌 건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만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제348호)로 지정돼 있기도 하다.

구 사제관 내 유물관에는 다양한 유물들이 보존돼 있다. 선교사들이 직접 미사주를 만드는 데 썼던 포도 착즙기, 밍크본이란 화가가 1930년대에 그린 43장의 성경 교리 포스터, 100년도 더 된 교적, 요리문답서, 역대 본당신부 사진까지 고스란히 남아있는 모습에서 역사와 전통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본당의 지혜를 엿볼 수 있다.

성당에 들어서면 본당의 주보인 안나상이 제대 오른쪽에 서 있다. 1923~1924년 사이 가실성당 신축 때 프랑스에서 들여온 것으로, 안나 성녀가 어린 마리아에게 책을 읽히는 모습이다.

또 한 가지 특징은 기름을 넣어 불을 켜는 천장의 성체등. 과거 신자들은 그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성체등 기름후원회까지 조직했다고 한다. 선대 신앙공동체의 열성을 지금까지도 계속 이어오고 있어서일까. 영롱한 빛을 은은하게 퍼뜨리는 성체등의 모습은 전등이 줄 수 없는 신비한 매력을 발산한다.

본당은 일제 수탈과 한국전쟁의 어려운 시기를 지나면서 침체기를 맞기도 하지만, 1952년 덕원과 연길에서 피란 온 성 베네딕도회가 사목을 맡으면서 활기를 되찾았다. 특징적인 것은 수도회 전례의 영향으로 제2차 바티칸공의회가 열리기도 전인 1940년대부터 주례사제와 신자들이 대화식으로 말을 주고받으며 함께 미사를 봉헌했다는 것이다. 또 수사들이 본당에 머물러 농장을 운영하면서 현대적 기계농법에 의한 농촌 부흥운동의 산실이 되기도 했다.

1995년 100주년 사업으로 현재의 성모동굴을 지었고, 2002년에는 독일 작가 에기노 바이너트의 ‘예수님의 삶’을 주제로 한 스테인드글라스 작품이 설치됐다.

지난 7월에는 가실성당의 역사를 담은 「가실(낙산)성당 100년사」도 출판했다. 16년이나 늦게 나온 것이지만, 그만큼 많은 자료들과 증언을 토대로 100년의 역사를 짜임새있게 담고 있다.

본당은 1960년대 말까지만 해도 신자 수 1400명이 넘는 곳이었지만 근대화·산업화의 물결에 밀려 지금은 시골의 작은 농촌 본당이 됐다. 하지만 가진 것을 나누기 위해 성당 문을 닫는 일이 없으며, 소규모 피정을 할 수 있도록 ‘순례자의 집’을 개방하고 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는 말처럼 가실본당은 지역의 영적 오아시스로, 모든 이의 가슴을 울리는 기도의 산실로서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유구한 역사를 싣고 변함없이 흘러가는 저 강물처럼….


 
▲ 설립 초기 기와집 형태의 가실성당.
 

정정호 기자 (pius@catimes.kr)



[기사원문보기]
가톨릭신문  2011-10-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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