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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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 선교의 뿌리를 찾아서] 메리놀외방전교회 2

평신도 고유 역할 강조한 쇄신운동 전개/ 가톨릭대학 개설해 청년 지도자 양성에 매진/ 가톨릭 연구 강좌 발간 등 문서 선교에도 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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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 메리놀회 지부 겸 본부.
 

1911년 미국 최초의 방인 선교회로 출범, 중국 진출을 통해 아시아 선교의 거보를 내디뎠던 메리놀외방전교회(이하 메리놀회)는 중국 선교 활동과 함께 새로운 선교지로 한국으로의 진출 확대를 모색하게 된다.

당시 총장이었던 월시(J.A Walsh) 신부는 1916년 한국을 방문한 가운데 뮈텔 주교를 만나 한국에서의 선교 활동에 관심을 표명했고 이에 파리외방전교회는 평안도 지방 관할을 프로테스탄트 선교사들과 국적이 같은 메리놀회에 맡기는데 동의하게 된다.

당시 삼남(三南) 지방보다 선교 활동이 늦었던 평안도 지역은 5개 본당과 50여곳의 공소를 파리외방전교회 소속 사제 3명과 한국인 사제 2명이 전담하고 있었다. 반면 프로테스탄트는 가톨릭의 열악한 선교 역량과는 대조적으로 풍부한 지원을 바탕으로 교육 및 의료 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면서 급속히 교세를 확장하고 있던 터였다. 뮈텔 주교가 메리놀회의 한국 진출에 뜻을 함께한 데에는 이 같은 평안도 지역의 선교사 부족 문제도 큰 배경으로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뮈텔 주교는 1922년 교황청 포교성성에 평안도 지역의 전교 문제를 의뢰하면서 메리놀회에 위임하는 것을 건의했다. 한국에서의 활동 기회를 기다리고 있던 메리놀회는 마침내 1922년 11월 교황청 포교성성으로부터 평안도 지방 포교권을 위임받게 되었고 그해 11월 27일 자로 방(P.J.Byrne)신부를 지부장으로 선출했다.

1923년 5월 10일 번 신부가 평양지목구 설정 준비 책임자로 입국한데 이어 같은해 10월과 11월에는 클리어리(P.Clerry) 신부와 모리스(J.Morris) 신부가 도착하면서 메리놀회 한국 지부는 공식적인 출발의 막을 올렸다.

교회 역사가들은 이때의 메리놀회 한국 진출에 대해 ‘한국 천주교회사 안에서 한국천주교회와 미국천주교회의 새로운 만남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그것은 이전의 천주교회에 대해 갖고 있던 한국인들의 인식을 바꾸어주는 역사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즉 개화기 이래 ‘천주교회는 프랑스의 종교’로, ‘프로테스탄트는 미국의 종교’로 이해하고 있던 상황에서 프로테스탄트의 나라로만 인지돼 있던 미국에도 가톨릭 교회가 있다는 사실은 당시 한국인들에게 꽤 놀라운 일이었다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메리놀회의 등장은 프랑스의 파리외방전교회가 중심이 되었던 한국 천주교회에 상당한 변화를 예고하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한국지부의 출범 후 1924년 캐시디(J.Cassidy) 신부 등 3명의 신부가 메리놀회 수녀 6명과 함께 입국, 의주에 정착했고 1926년 5월부터 은산 비현 중화 지역 등에 본당을 신설했다.

지부장 번 신부는 본당 신설 추진과 함께 입국 선교사들을 위해 조선어연구 학교를 마련하고 조선의 언어와 풍습을 익히게 했다. 또 비현본당에는 1928년부터 시약소를 설치하면서 간이 진료소 역할까지 담당토록 했다.

이러한 활발한 활동 속에 지역 총 신자 수는 약 5000명을 헤아리게 됐고 미국 본부로부터 속속 선교사들이 입국, 인적 확보가 가능해지면서 평안도는 메리놀회 전담 지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드디어 1927년 교황청 포교성성에서는 평양지역을 지목구로 설정하고 초대 지목구장에 번(방) 신부를 임명했다. 번 신부는 임시 본부 형태의 한국지부를 신의주 진사동으로 이전했고, 한식과 양식이 절충된 연와제(燃瓦製)성당을 신축했다. 명실공한 한국 선교 활동 기반이 만들어지게 된 것이었다.

평양지목구의 새로운 중심지를 관서 지방 중심인 평양으로 이전할 것을 결심하고 서포 지역에 본부를 설치하고자 추진하던 중 번 신부는 1929년 메리놀회 부총장에 피선되고 모리스 신부가 2대 지목구장에 임명됐다.

메리놀회의 초기 한국진출 역사에서 모리스 신부의 제2대 지목구장 시기는 메리놀회의 한국 정착과 그 활동 방향이 설정된 때로 평가받는다.

모리스 신부는 신설된 평양교구를 중심으로 기존의 파리외방전교회와는 완연히 다른 모습으로 본당과 교구를 운영하는 새로운 선교 정책을 본격적으로 보여주었다. 그의 재임 기간 중 평양 지목구는 36명의 선교사가 활동하는 가운데, 19개 본당 134개 공소에 총 신자 수 1만7738명이라는 괄목할 만한 성장세를 이룩했다.

한편 메리놀회는 한국교회 자립을 위해서는 방인 사제와 수녀 양성이 시급하다는 인식을 갖고 성소자 개발에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평양 지목구 설정 당시 세명에 불과하던 신학생은 1936년 11명으로 증가하였고 1932년에는 모리스 신부에 의해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회’가 창립됐다. 한국 가톨릭교회 최초의 방인수녀회였다.

교회내 전문가들은 이 시기에 메리놀회가 벌인 선교 활동 중 가장 먼저 손꼽을 수 있는 내용으로 ‘평신도 쇄신 운동’을 지적한다. 메리놀회는 당시 한국교회가 교세의 정체, 일제 천주교회에 대한 압박, 공산주의의 대두 등 여러 가지 문제에 직면하고 있던 상황에서 교회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 평신도 역할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식시키고자 노력했고 이런 배경에서 평신도 쇄신 운동을 전개했다.

‘가톨릭 운동 연맹’을 조직해서 일제 치하에 있는 민족의 부흥과 가톨릭 진흥을 도모하는가 하면, 가톨릭 운동 연맹이 주최한 가운데 1934년 ‘평양교구 평신도 대회 개최’, 1935년 ‘한국 천주교 전래 150주년 기념 행사’ 등을 열기도 했다.

또 예비신자 교육을 전담할 전교 회장 양성 필요성을 절감, 1933년부터는 해마다 ‘평양지목구 전교회장 강습회’를 개최했고 ‘하기 가톨릭대학’을 개설해서 가톨릭 청년 지도자 양성에도 힘썼다.

1930년대 메리놀회가 평양교구를 통해 보여준 이 같은 활동들은 평신도들의 고유 역할을 강조하고 쇄신을 이끌었다는 면에서 한국교회사 안에서도 매우 주목되는 사안으로 눈길을 모으고 있다.

이 시기 메리놀회의 선교 움직임에서 또 하나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은 문서선교 측면이다. 평양교구는 1934년 잡지 ‘가톨릭 연구 강좌’를 발간, ‘활자 대학’이라 칭하며 평신도들의 쇄신을 독려하고 한국인들에게 가톨릭을 제대로 알리는데 관심을 기울였다. 그해 7월 ‘가톨릭 연구’로 제호가 변경된 이 잡지는 1937년 ‘가톨릭 조선’으로 명칭이 다시 개칭되며 다양한 내용과 구성으로 평안도 지역은 물론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었으나 1938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됐다.

이와 함께 한국교회사의 연구 측면도 메리놀회가 당시 보여준 중요 역할 중 빠질 수 없는 부분이다. 메리놀회는 ‘가톨릭 연구’를 통해 세계교회사와 한국천주교회사를 지속적으로 소개하면서 신자들이 세계교회 역사 흐름 속에 한국교회사의 위치를 파악할 수 있도록 했다.


가톨릭신문  2011-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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