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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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0> 신석복(마르코,1828~1866)

생사를 초월해 복음 증거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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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마태 5,13).
 "하늘 나라는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마태 13,33).

 소금과 누룩이 돼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이다. 소금과 누룩과 같이 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이 아니라는 뜻이다. 소금이 짠맛을 내기 위해서는 자신은 녹아 사라져야 한다. 누룩도 자신은 발효돼 사라져야만 빵을 부풀게 할 수 있다. 소금과 누룩은 남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도 세상에 짠맛을 내고 세상을 부풀리게 하려고 산다. 그러려면 자신을 버려야 한다. 소금과 누룩을 팔아 생계를 잇던 신석복(마르코)은 소금과 누룩으로 살다 순교로써 하느님 품에 안겼다



 
▲ 신석복이 태어난 경남 밀양 명례에 있는 명례성지.
조만간 신석복 마르코 기념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신석복(申錫福)은 1828년 경남 밀양 명례(밀양시 하남읍 명례안길)에서 태어났다. 그에 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단편적으로 전해질 따름이다. 먼저 그 기록들을 살펴보자.
 
 -본디 밀양(密陽)사람이라. 대구 포교에게 잡혀 교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대개 병인 2월 15일이러라(「치명일기」 795. 신 이냐시오).
 
 -795에 있는 신 이냐시오는 이냐시오가 아니오라 말구(마르코)오니 본명을 바꾸소서. …본디 밀양 명례 살더니 병인년 정월에 창원 마포에 장사 간 후에 대구 령포 우두머리가 내려와 가산을 탈취하고 여러 날을 수소문하여 장사 갔다가 온다는 말을 듣고 포졸들이 마주 가다가 김해 가산 지경에 이르러 행인 4~5인을 만나 성명을 차차 물으니 "내가 신(申)가라" 하거늘 즉시 수감하야 밀양으로 와서 하룻밤 사이에 무수한 형벌을 가하고 떠나가니, 형제와 주민과 포졸과 의논하여 전(錢) 80냥을 가지고 또 나와 은근한 곳에 안치하고 말구에게 통기하거늘, 말구는 그 형다려(에게) 말하되, "일 푼전이라도 주지 마라"하고, 포졸을 재촉하여 가거늘, 그 형들은 돈을 가지고 회로(돌아)오고 말구는 포졸과 한가지로 가매, 지근(눈ㆍ귀ㆍ코ㆍ혀 등 몸의 오근) 지껄 능욕을 받고, 대구 진영으로 가서 3번 형벌에 전신이 성한 곳이 없어 육혈에 옷이 다 젖고, 뼈가 부러지되, 종시 배교하지 아니하니, 다시 옥에 놓였다가 9일 후에 교(絞)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요 때는 병인년 2월 2일. 오(吳) 야고보는 말구와 한 가지로 잡혀 대구서 동시 치명하니라. (말구의) 자식, 니고나오 지금 명례에 산다.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동내 주민 한 사람 최명언(「병인치명사적」 18권).
 
 -신(申) 이냐시오는 경상도 밀양 사람이라 봉교한지 십여 년 후에 병인년 이월 초일에 대구 포교에게 잡혀 진영(鎭營)서 추열(推閱)할 때 매를 많이 맞아 상하고 감옥에 갇혔더니 외교인 일가가 영문을 정하여 대사(사면하는 글)를 진영에 올리매, 영장(營長)이 다시 올려 묻기를 "네가 천주학을 하느냐." "합니다." "너를 놓아주어도 하겠느냐." "나가도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놓아주지 아니하고 십여 일 만에 교살(絞殺)하여 치명하니 나이는 39세였다(「병인치명사적」 3권).

 신석복은 명례에서 소금과 누룩 행상을 하며 살았다. 일찍이 명례에는 박해를 피해 도망온 신자들이 모여 살았는데, 신석복은 이들 권유로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신석복의 형제들은 그가 순교할 때만 해도 신자가 아니었으나 훗날 모두 하느님의 자녀가 됐다.

 1866년 병인박해가 일어나자 대구 포졸들은 신석복이 천주교 신자라는 사실을 알아내고 명례에 있는 그의 집을 찾아가 재산을 빼앗았다. 수소문 끝에 신석복이 창원 쪽으로 장사를 하러 나갔다는 것을 알게 된 포졸들은 신석복을 기다리다가 김해 가산이라는 곳에서 체포했다. 함께 갔던 오 야고보도 잡혔다.

 포졸들은 밀양에서 하루를 머무는 동안 신석복에게 무수한 형벌을 가했다. 그 뒤 그를 대구로 끌고 갔는데, 이때 신석복의 형제들이 돈을 마련해 대구로 가는 일행을 뒤쫓아갔다. 일행을 만난 형제들은 포졸들에게 돈을 주고 신석복을 빼내고자 했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신석복은 형제들에게 "포졸들에게 한 푼도 주지 말라"고 단호하게 말했다. 돈으로 목숨을 구걸하지 않겠다는 강한 의지였다.

 이제민(마산교구 명례성지 담당) 신부는 지난해 9월 `순교자 신석복의 영성과 명례성지에 대한 고찰` 심포지엄에서 "신석복의 이 말을 단순히 교회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는 식으로 호교론적으로만 이해한다면 이는 순교의 의미를 퇴색시키는 일"이라며 "이 말은 생과 사를 초월해 사는 자, 자신을 예수님의 복음으로 변화시킨 자만이 할 수 있는 말"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돈과 명예와 권력에서 자유로운 그리스도인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대구로 가는 동안 신석복은 돈을 받지 못한 포졸들에게 능욕을 당해야 했다. 대구에 도착한 신석복은 수차례 문초와 형벌로 유혈이 낭자하고 뼈가 부러졌다. 그럼에도 그는 결코 신앙을 버리지 않고 "저를 놓아주신다 해도 다시 천주교를 봉행할 것입니다"라며 굳세게 맞섰다.

 그런 신석복에게 혹독한 형벌이 더해졌음은 물론이다. 며칠 후 신석복은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1866년 3월 31일(음력 2월 15일)로, 당시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신석복 유해는 아들 신영순(이냐시오)이 돈을 가지고 대구로 가서 모셔왔다. 그러나 지방 유지들 반대로 명례에는 모시지 못하고 부득이 낙동강 건너 한림정(翰林亭) 뒷산 노루목(김해시 한림면 장방리)에 매장했다. 이후 명례지역을 관할하던 마산교구 진영본당은 순교자 묘가 야산에 있음을 안타깝게 여겨 1975년 본당 공원묘지로 이전했다.

 신석복의 부인은 신석복이 순교한 후에도 오랫동안 명례에서 살았다. 아들 신영순은 아들 4형제를 낳았는데, 막내가 신순균(1910~1948) 신부다. 1935년 사제품을 받은 신 신부는 경남 고성 황리본당 초대 주임으로 마산교구와 인연을 맺었다가 1948년 39살 젊은 나이로 선종했다.

 신석복이 태어난 명례에는 1897년 명례본당이 설립됐다. 마산교구 첫 본당으로, 초대 주임은 한국교회 세 번째 사제인 강성삼(1866~1903) 신부였다. 강 신부 선종 후에는 공소로 명맥을 이어왔다.

 한편 마산교구가 신석복 생가터와 명례성당을 성역화하고자 구성한 명례성지조성추진위원회(위원장 이제민 신부)는 8일 신석복 생가터에 신석복 마르코 기념관을 세우는 성지조성 기본계획을 발표했다. 전시관과 교육관, 성당, 문화센터 등이 들어설 기념관은 신석복의 영성과 삶을 본받고 한국교회 뿌리와 만날 수 있는



가톨릭평화신문  2012-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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