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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1) 박상근(마티아,1837~1867)

선교사 칼레 신부 피신시키고 순교의 월계관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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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상근의 묘가 있는 안동교구 문경 마원성지.
 
 
박상근(마티아)은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25위 가운데 유일한 안동교구 출신이다. 1984년에 시성된 한국 순교성인 103위 중에도 안동교구 출신은 없다. 박상근이 성인반열에 오르면 안동교구가 낳은 첫 번째 성인이 되는 것이다.

 산세가 험해 구름도 쉬어 넘어간다는 문경새재로 잘 알려진 경북 문경에서 태어난 박상근은 말단 관리인 아전 출신이다. 1837년 박상근이 태어날 당시 문경은 신유박해(1801)를 피해 숨어든 충청도지역 신자들이 교우촌을 이루고 살았다. 박상근은 이들과 접촉하면서 천주교에 입교한 것으로 보인다.

 교리를 착실히 지키며 살던 박상근은 아전으로서 신자들이 어려운 일을 당할 때마다 많은 도움을 줬다. 숙모인 홍 마리아와 친척은 물론 이웃 사람들에게 천주교 교리를 열심히 가르쳤고, 미신자라도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는 소식을 들으면 언제든 달려가 대세를 주곤 했다.

박상근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이가 파리외방전교회 칼레(N. Calais, 1833~1884) 신부다. 두 사람의 운명적 만남은 1866년 병인박해 때 이뤄졌다. 그해 3월 15일 박상근은 좁쌀을 사려고 한실(경북 문경시 마성면 성내리)로 갔다가 그곳에서 칼레 신부를 만난다. 칼레 신부는 경상도 교우촌을 순방하던 도중 병인박해 소식을 듣고 한실 교우촌에 숨어 지내던 참이었다.

 한실 신자들은 칼레 신부가 한실보다는 문경 읍내에 숨는 것이 더 안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한실은 주민 모두가 천주교 신자여서 들킬 우려가 컸기 때문이다. 당시 문경 읍내에 살고 있던 신자는 15명으로, 만약 누군가 신부를 모시게 되면 그 집주인은 신부를 숨겨줬다는 죄목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상황이었다. 박상근은 한실에서 칼레 신부를 모실 것을 결심했다. 죽음을 각오한 용기 없이는 불가능한 결심이었다.

 칼레 신부와 함께 문경 읍내에 있는 자기 집에 도착한 박상근은 큰 항아리와 가구들로 가득찼던 방을 정리해 신부가 누울 자리를 마련했다. 날씨가 추웠지만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까봐 칼레 신부 방에 군불을 땔 수도 없었다. 칼레 신부는 식사할 때 소리가 나는 것을 우려해 나무로 만든 식기를 사용했다. 하지만 발각되는 것은 시간 문제였다.

 칼레 신부가 박상근의 집에 온 이튿날 저녁, 어떤 사람이 박상근의 집에 들렀다가 방에서 기침하는 소리가 들려 방문을 열어보고는 깜짝 놀랐다. 웬 외국인이 앉아 있었던 것이다. 그는 아무 말 없이 돌아갔지만 그 사람으로 인해 거처가 드러난 것이 분명해 보였다. 칼레 신부는 박상근을 불러 곧 떠나야겠다고 말했다. 박상근은 밤을 새워 칼레 신부가 머물 수 있는 곳을 찾아다녔다. 돌아오는 길에 포졸들이 곧 들이닥칠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박상근은 다음날 칼레 신부와 함께 새로운 은거지를 찾아 길을 나섰다. 일단은 한실로 되돌아가기로 했다.

 칼레 신부는 이때 상황을 파리외방전교회 신학교 알브랑 교장 신부에게 보낸 1867년 2월 13일자 서한에 다음과 같이 썼다.

 "…우리가 문경을 떠난 것은 참 잘한 일이었습니다. 동이 틀 무렵 마티아와 저는 숲이 우거진 산속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먹을 거라고는 마른 과일(곶감) 몇 개가 전부였습니다.… 저는 마티아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제 20리만 더 가면 한실이 내려다보이는 산꼭대기에 닿을 테고, 어느 산봉우리에서도 그 산을 알아 볼 수 있을 터이니, 나는 이 길을 거뜬히 갈 거요. 자네는 너무 지쳤으니 자네가 알고 있는 이 근처 마을을 찾아 끼니를 들어요.`

 그러자 이 인정많은 교우는 제게 이렇게 답했습니다. `신부님, 제가 어찌 초행길이신 이 산에 신부님을 홀로 두고 갈 수 있겠습니까. 저는 그 말씀에 동의하지 못하겠습니다. 행여 한실에 아무도 없으면 어디로 가시려고요. 신부님께서 피신할 곳이 없을 터인데, 신부님께서 가시는 곳이라면 저도 갈 겁니다.`
 이상이 저희 두 사람 사이에 오고 간 자기 희생의 다툼 중에 이 헌신적인 교우가 했던 말입니다. 그의 말은 옳았습니다. 제가 큰 위험에 처해 있다는 것을 저도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아무 것도 먹지 못한 채 밤까지 저를 따르기는 불가능해 보였을 뿐만 아니라, 내심 저는 더는 물러서선 안 된다고 느꼈습니다. 그리하여 저는 저를 너무도 감동시킨 이 사람에게 명령이라는 방법을 택해 이렇게 말했습니다.

 `마티아, 내 말대로 할 것을 명하겠네. 자네가 가져온 마른 과일 절반을 챙기고 나머지 절반을 내게 주게. 그리고 자네 신부인 내 말을 따르게.` 이 말에 그는 저를 바라보며 울기 시작했고, 저는 고함을 쳤습니다. 사실 제 마음도 비수에 찔린 듯 아팠고, 저 또한 더 이상 눈물을 참을 수 없었습니다. 그의 손을 잡고 저희 둘은 함께 울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저희를 지켜보고 계셨으며, 모든 것을 당신 뜻대로 마련해 주셨습니다. 몇 마디 말을 나눈 뒤 저는 혼자 떠났습니다.

 그가 멀리 있었지만,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울고 있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는 눈을 제게서 떼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윽고 산 하나가 나오면서 제 시야에서 그가 사라졌고, 저는 하느님께 저를 맡기고 줄곧 걸었습니다.…" 실로 눈물겨운 이별이 아닐 수 없다.

 칼레 신부 명에 따라 집으로 돌아온 박상근은 얼마 후 체포돼 상주로 끌려갔다. 그는 어떤 문초와 형벌에도 "천주교를 봉행한다"는 말로 신앙을 증거하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때 상주 옥에는 인근에서 잡혀온 신자들이 많았다. 박상근은 관아에서 문초를 받고 옥으로 돌아가서는 함께 옥에 갇힌 신자들에게 주님 가르침을 따를 것을 권면했고, 많은 신자들이 박상근에게 용기를 얻어 순교를 자처했다. 1867년 1월 박상근은 마침내 교수형으로 순교했다. 박상근은 순교하기 직전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 마리아를 불렀다고 한다. 당시 그의 나이 31살이었다.

 그의 가족은 시신을 찾아다 고향에 안장했다. 정확한 위치를 알 수 없었던 그의 묘는 1983년 안동교구 김욱태 신부에 의해 문경시 마원리 박씨 문중 산에서 발견됐다. 유해는 1985년 문경시 문경읍 마원리 599-1에 조성된 새 무덤으로 이장됐다. 지금의 마원성지다.

 한편 박상근과 헤어진 칼레 신부는 1866년 10월 페롱 신부와 함께 무사히 중국으로 피신했고, 이듬해부터 여러 차례 조선 땅에 다시 들어오고자 애썼지만 뜻을 이룰 수 없었다. 병인박해 때 얻은 병이 악화돼 부득이 프랑스로 돌아간 칼레 신부는 1869년 4월 시토회에 들어가 한국교회를 위한 기도로 남은 생을 보냈다.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가톨릭평화신문  2012-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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