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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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2) 이성례(마리아,1801~1840)

곤장에 용맹했으나 모성에는... 배교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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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성례가 참수형으로 순교한 당고개에 있는 당고개순교성지(서울 용산구 신계동).
 
 
"(저의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는 조선의 유명한 이씨 가문에서 출생했는데, 그 가문에서 유명한 인사들이 여러 명 배출됐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단원 이존창이었습니다. 그는 첫 선교사 신부님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조선에 오기 전에 시골 지방에서 복음을 전파하는 사제 직분을 집행했던 분입니다.…

 이존창 집안이 처음에는 모르고서 가짜 사제를 냈으나 나중에는 진짜 사제를 내는 영광을 갖게 됐습니다. 그 집안의 딸들에게서 사제 두 명이 탄생한 것입니다. 그의 딸 멜라니아는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님 조모이고, (모친은) 이존창의 사촌누이 멜라니아의 조카딸입니다.…

 이 마리아는 4남 6녀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남성처럼 씩씩한 정신을 타고났는데, 열여덟 살 때 프란치스코와 결혼했습니다. 마리아는 집안을 지혜롭게 꾸려나갔으며, 식구들 간에 불화 없이 지내게 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해 고향과 재산을 모두 버리고, 극도의 궁핍과 굶주림 가운데 험한 산속으로 방황하기를 수년을 거듭했는데도 이 모든 것을 기쁘게 참아 받았습니다. 남편을 따라 먼 곳으로 이사 갈 때나 먼 길을 걸을 때 어린 자식들이 굶주림에 지쳐서 칭얼거리면 그리스도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이 이집트로 피난 가시던 이야기와 갈바리아산에 십자가를 지고 오르시는 예수님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자식들에게 인내심과 참을성을 키워줬습니다. 남편이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데도 남편을 공경하고 순종하며 부부가 한마음 한뜻으로 화목하게 살았습니다.…"

 한국교회 두 번째 사제인 최양업(1821~1861) 신부가 1851년 마카오에 있는 스승 르그레주아 신부에게 보낸 편지 일부로, 어머니 이성례 마리아에 관해 언급한 대목이다. 편지에 나오는 아버지 프란치스코는 103위 순교성인 가운데 한 분인 성 최경환(1805~1839).
 장남 최양업을 한국교회 주춧돌로 키우고, 남편을 따라 순교로써 하느님 품에 안긴 한국의 여인이 바로 이성례(李聖禮)다. 이성례와 최양업은 둘 다 현재 한국교회가 시복시성을 추진하고 있는 하느님의 종 125위에 포함됐다. 이들이 성인품에 오르면 모자(母子) 성인이 탄생하는 것이다.
 
 1801년 충청도 홍성에서 태어난 이성례는 최경환과 혼인한 뒤 청양 다락골에 살면서 1821년 장남 최양업(토마스)을 낳았다. 가족과 함께 한양으로 이사를 했다가, 박해 위험이 있자 강원도와 인천 부평을 거쳐 수리산(현 경기도 안양시)으로 이주했다. 고향과 재산을 버리고 낯선 곳으로 옮겨 다니는 가운데서도 이성례는 모든 어려움을 기쁘게 참아냈다. 수리산에 정착해서는 남편을 도와 마을을 교우촌으로 일구는 데 헌신했다. 장남 최양업은 이때 신학생으로 선발돼 마카오로 떠났다.

 1839년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남편 최경환은 한양을 오가면서 순교자들 시신을 찾아 묻어주고 교우들을 돌봤으며, 이성례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면서 자식들을 보살폈다. 부부는 자신들도 곧 체포되리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부부는 새벽에 수리산 교우촌을 급습한 포졸들을 기다리기라도 한 듯 반갑게 맞았다.
 최경환은 포졸들에게 교우들과 함께 질서정연하게 따라갈 테니, 잠시 쉬었다가 식사를 하고 떠날 것을 권했다. 이성례는 포졸들을 위해 밥상을 차렸고, 최경환은 포졸들이 식사를 마치자 장롱에서 옷을 모두 꺼내 포졸 한 명 한 명에게 입혀줬다. 순교하면 필요 없게 되는 옷이었다. 그 사이 감옥으로 떠날 준비를 마친 남녀노소 신자 40여 명은 행렬을 이뤄 한양을 향해 걸어갔다. 이성례도 젖먹이를 포함한 아들 5명을 데리고 남편을 따랐다. 신자들이 달아날 염려가 없다는 것을 안 포졸들은 이들을 오랏줄로 묶지도 않았다. 끌려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들이 순순히 나선 것은 순교를 기쁜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포도청으로 압송된 이성례는 남편과 격리된 채 젖먹이 아들(스테파노)과 함께 여인 감옥에 수감됐다. 잡혀온 다음날부터 문초와 형벌을 받아 팔이 부러지고 살이 너덜너덜하게 찢어졌지만 용감하게 신앙을 증거했다. 이미 순교를 각오한 터였다.

 정작 이성례를 괴롭힌 것은 자신의 죽음이 아니라 옥에 함께 있는 젖먹이였다. 젖은 나오지 않고 먹일 것이 없어서 막내아들이 굶어 죽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남편은 매를 맞아 순교하고, 젖먹이는 더러운 감옥에서 죽어가는 것을 보면서 이성례의 마음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순교하면 젖먹이뿐만 아니라, 밖에서 구걸로 연명하고 있는 나머지 4형제 모두 고아가 되는 것이다.

 결국 스테파노가 굶어 죽자 이성례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다. "천주를 모른다"고 외치고 감옥에서 풀려나왔다. 남은 아이들마저 잃고 싶지 않은 지극한 모성애였다.
 얼마 후 이성례는 큰아들 최양업이 외국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다시 압송됐다. 그는 옥에 갇혀 있는 신자들 격려에 힘을 얻어 전에 했던 말을 용감하게 취소했다. 잠시나마 배교한 것을 뉘우치고 영광스럽게 순교하기로 굳게 결심했다.

 둘째 아들 야고보는 감옥을 드나들며, 구걸한 돈으로 마련한 음식을 어머니께 갖다 드렸다. 이성례는 철모르는 어린 자식들이 부모 없이 지낼 것을 생각하자 모정에 다시 한 번 몸을 떨어야 했다.

 이성례는 문초와 형벌 끝에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감옥으로 찾아온 야고보에게 형장으로 오지 말 것을 당부했다. 마음이 약해질 것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이성례는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이제 그만 가거라. 절대로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잊지 말아라. 서로 화목하게 살며, 어떤 어려움을 당하더라도 서로 떨어지지 말고 맏형 토마스(최양업)가 돌아오기를 기다려라."

 야고보는 모정에 눈물짓는 어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한 뒤 감옥에서 나왔다. 야고보는 감옥 사람들에게 어머니를 마지막 순간까지 조심스럽게 지켜줄 것을 부탁했다.

 1840년 1월 31일, 이성례는 동료 신자들과 함께 형장으로 정해진 당고개(현 서울 용산구 신계동)로 끌려가 참수로 순교했다. 안온하고 평화로운 얼굴이었다고 한다. 그의 나이 39살이었다.

 최경환ㆍ이성례 후손에 따르면 최양업 신부 첫째 동생 야고보는 둘째를 목천 서덕골 큰아버지 댁에, 셋째를 용인 한덕골 작은아버지 댁에 나눠 의탁했다. 그리고 넷째 동생은 진천 동골에 있는 친척 집에 맡겼다. 신부가 돼 돌아온 맏형 최양업은 1849년 용인 한덕골 작은 아버지 집에서 동생 4형제를 만났다. 몇 년 후 최 신부는 셋째ㆍ넷째 동생을 신심이 깊은 송구현(도미니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의 장녀 송 막달레나, 차녀 송 아가타와 결혼시켰다.
  남정률 기자
[기사원문보기]
가톨릭평화신문  2012-1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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