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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열전] (23) 정찬문(안토니오,1822~1867)

신앙 지키려 매 맞아 순교... 죽어선 목마저 잘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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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에 있는 순교자 정찬문의 묘.
 
 
"무촌리 무두묘에 비가 오고 있다 /목을 내어 놓고도 /서럽지 않았던 순교자 정찬문 /그의 묻혀져 있는 자리 /눈대중으로 못찾았던 무촌리 사람들의 어깨 위에 내리던 그 비 /지금 오고 있다 /거기 파보아라 /사촌들이 머리 없는 시신 덮어 두었던 자리 /거기 파보아라 /손가락으로 가리켜 주었던 /구순 노파 텃골 마누라의 적중이 /오늘 사봉면 일대 무언의 풍경이 되어 /빗물에 화안히 씻겨지고 있다 /천주교 사봉공소의 십자첨탑 /거기 어린 녹물도 /하나로 화안히 씻겨지고 있다"
 강희근(요셉) 시인이 순교자 정찬문(안토니오) 무두묘 앞에서 쓴 시 `무촌리 풍경`이다. 무두묘(無頭墓)는 머리가 없는 무덤이라는 뜻. 어찌 된 연유일까. 정찬문의 행적과 무두묘의 사연을 쫓아가보자.



정찬문(鄭燦文)은 1822년 10월 경남 진주시 사봉면 무촌리 중촌에서 진양 정(鄭)씨 양반 집안의 부친 정서곤과 모친 울산 김씨 사이 외아들로 태어났다. 진양 정씨 가문은 고려 말 두 임금을 섬기지 않겠다는 지조로 낙향한 우곡 정온의 후손으로, 정찬문도 이러한 가풍을 이어받아 꿋꿋한 성품을 지닌 인물이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정찬문을 천주교로 이끈 이는 부인이다. 천주교 집안에서 태어난 부인 윤씨는 남편에게 입교를 권했고, 아내 뜻을 따라 1863년 41살에 세례를 받은 정찬문은 성가정을 이루며 전교생활에 충실했다. 아직 박해가 본격화하지 않았던 시기여서 부부의 신앙생활과 전교활동은 큰 어려움이 없었다.

 입교한 지 3년이 지난 1866년, 병인박해의 광풍이 진주에도 불어 닥쳤다. 사방에서 신자들이 체포됐고, 정찬문도 그해 가을 진주 포졸들에게 붙잡혔다. 이때 평소에 알고 지내던 관리가 와서 "배교한다는 말만 하면 끌려가지 않도록 하겠다"고 회유했지만 정찬문은 흔들리지 않았다.

 진주로 끌려간 정찬문은 옥에 갇혀 있으면서 수시로 끌려 나가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동안 그의 재산은 몰수됐고, 가족은 궁핍한 생활을 해야 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도 그의 아내는 밥을 빌어다 옥으로 가져가 그에게 넣어주곤 했다.

 어느 날 정찬문은 다시 옥에서 끌려나와 무수히 매를 맞았다. 그러나 그는 결코 신앙을 저버리지 않았다. 다시 옥으로 돌아간 뒤 그날 밤 숨을 거두니, 1867년 1월 25일의 일이다. 당시 그의 나이 45살이었다.

 정찬문이 순교한 후 부인 윤씨는 시댁에서 쫓겨났다. 남편을 처참한 죽음에 이르게 함으로써 가문에 먹칠을 한 장본인이라며 부인 윤씨를 몰아세웠기 때문이다. 윤씨는 시댁 친족의 구박을 견디다 못해 아들을 데리고 눈물로 고향을 떠났는데, 이후 행방은 아무도 모른다. 이에 정찬문의 고향에는 직계 후손이 아닌 방계 후손만 남게 됐다.

 정찬문이 순교한 후 그의 사촌들이 순교자 시신을 찾아왔는데, 머리가 없었다. 하는 수없이 몸체만 장사지냈다. 순교자 무덤에는 머리가 없다는 것이 신자들 입을 통해 전해졌고, 무두묘(無頭墓)라는 말은 이렇게 해서 생겨났다. 그렇다면 어째서 머리가 없었을까.

 「병인박해 순교자 증언록」(163번)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나온다.
 "정(찬문) 안토니오는 본시 진주 동면 허유고개 사람으로 병인년 가을에 진주 포교에게 잡혀 고복(考覆)하고 진주로 가 옥중에 여러 달 갇혔다가 영정(營庭)에서 형장(刑杖)을 받아 치명하니, 지금 장수 가항 사는 김 회장 바오로가 그때 진주 소촌 사는 구 다테오에게 자세히 들었더라."

 여기서 `고복`(考覆)은 죽을 죄에 해당하는 죄인의 죄목을 재심한다는 말이다. 아마 정씨 문중에서 정찬문을 살리려고 고복을 청했던 모양이다. 정찬문은 천주교인이 아니니 다시 심판해 달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문중에서는 정찬문을 회유하려 했을 것이다. 그러나 순교자는 완강히 거부했다. 진주 감영에서 순교자 시신을 다 내주지 않은 것은 정찬문이 고복과 관련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다.

 시간이 흐르면서 정찬문의 묘가 무두묘라고만 전해져올 뿐, 정확히 어디 있는지를 아는 이는 없었다. 역사 뒤안길로 사라질 뻔했던 무두묘를 찾아낸 이는 1946년 진주 문산본당 7대 주임으로 부임한 서정도 신부다. 서 신부가 무두묘를 발견하게 된 경위도 참으로 극적이다.

 순교자 무덤을 꼭 찾고 싶었던 서 신부는 1947년 순교자 무덤 조사에 들어갔다. 1948년 3월 29일 본당 청년들과 순교자 묘소 발굴에 나선 서 신부는 순교자 후손인 정경진 증언을 토대로 중촌에 있는 한 무덤을 파보았으나 무두묘가 아니었다. 땅거미가 질 무렵 서 신부와 일행은 문산으로 돌아가고, 차편이 없는 몇몇 청년만 남게 됐다.

 그때 그 동네에서 태어나고 출가해 같은 마을에서 줄곧 살아온 `텃골 마누라`라는 노인(당시 84살)이 청년들에게 다가와 언짢아하며 "왜 엉뚱한 무덤을 팠을꼬! 찾는 무덤은 다른 곳에 있는데…"하고 혀를 찼다. 그러고는 어릴 때부터 `서학을 하다가 목 잘려 죽은 이의 무덤`이라고 알고 있다는 허유고개 무덤을 알려줬다. 앞에서 언급한 강희근의 시에 나오는 `구순 노파 텃골 마누라`가 바로 그 노인이다.

 노인이 파보라던 무덤을 청년들이 열었을 때, 구덩이를 깊이 파지 않고 매장한 흔적이 뚜렷했다. 그리고 머리가 없는 시신이 나왔다. 노인의 제보로 정찬문의 무두묘를 찾은 것이다. 무덤은 허유고개 비탈길 가에 있었는데, 아무도 무덤인줄 모를 정도로 봉분이 허물어져 있었다.

 소식을 들은 서 신부는 청년들이 예를 갖추지 않고 순교자 무덤을 파헤친 성급한 행동을 못내 아쉬워했다. 서 신부는 그해 5월 신자들과 순교자의 외인 친척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무덤을 다시 열고 유해를 새로 입관했다. 그리고 중촌마을 학생들이 다니는 길목에 있던 순교자 묘를 약간 위쪽으로 이장한 뒤 본당에서 준비한 비석을 세웠다. 이후 1975년 10월 새로 조성된 문산본당 사봉공소 순교자묘역(사봉면 무촌리 중촌마을)으로 순교자 시신을 다시 이장했고, 1978년 1월 묘지를 새로 단장하면서 그 옆에 순교비를 세웠다.

 정찬문 순교자 묘지를 관리해온 문산본당은 본당 설립 100주년을 맞아 2005년 4월 순교자 묘지가 있는 사봉공소에 새 공소 건물을 신축하고 축복식을 가졌다. 성지순례 문의 : 055-761-5453, 문산본당(http://mun.cathms.kr)
남정률 기자 njyul@pbc.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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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평화신문  2012-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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