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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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26> 정광수ㆍ윤운혜 부부와 여동생 정순매

신앙으로 만나 주님 향해 나아간 아름답고 숭고한 부부 삶의 사표(師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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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찬미가 `떼 데움(Te Deum)`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순교자들의 무리가 당신을 찬미합니다."

 이를 통해 교회는 `순교자의 교회`라는 사실이 자명해진다.

 초대 교회에서 뿌려진 순교의 씨앗은 싹을 틔웠다. 교회는 이교도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그 이후에도 교회 역사는 계속 흘렀다.

 교회사 안에서 어떤 세기도 순교자가 나지 않은 때는 없었다. 선교 역사 안에서 순교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18~19세기 조선 교회사 또한 선교 역사이자 동시에 순교 역사였다. 정광수(바르나바, ?~1802)ㆍ윤운혜(루치아, ?~1801) 부부의 삶 또한 선교와 순교 역사가 엇갈려 교차하고 있다표 오빠 정광수ㆍ윤운혜 부부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한 정순매(바르바라, 1777~1801) 또한 동정녀 공동체 일원으로서 열심히 선교 활동을 하다가 순교함으로써 꽃을 피웠다. `누구보다` 열심히 살았던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보자.



 
▲ 탁희성 화백의 순교자 시리즈 제48도 `정광수 바르나바의 편지 심부름`.
초창기 조선교회 지도자였던 정광수가 주문모 신부가 보내는 편지를 김건순에게 전달하고 있다.
 

 "죄인 정광수는 사호(邪號)가 파이납(巴爾納, 바르바라의 한자 표기)으로 늘 무리들을 모아 놓고 날마다 강습하면서 자신의 처 윤운혜와 더불어 어리석은 백성들을 속여 유혹했고 사학서적을 직접 만들어 여러 곳으로 다니며 팔았습니다."

 "이희영ㆍ정광수ㆍ홍익만 등의 무리는 스스로 서양학문을 익힌 자들이었는데, 김건순(요사팟)이 그들에게 소개를 받아 주문모를 찾아가 만나보고는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고 마음을 기울여 교류하면서 수작했다."

 순조실록은 권2, 권3에서 경기도 여주 출신 순교자 정광수의 삶에 대한 간략한 기록을 남기고 있다. 사관들의 사초(史草)를 거쳐 최종적으로 기록된 왕조실록에 정광수의 삶이 남아있다는 사실은 그의 삶이 당대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는지를 잘 보여준다. `강습`을 교리교육으로, `유혹`을 전교로, `사학서적`을 교리서로, `교류하고 수작했다`를 친교했다로 바꾸면 그대로 아름다운 한 편의 현대적 선교 드라마가 되는 듯하다.

 

 #조선교회 초기 공동체의 주추로 서다

 정광수는 여주 부곡(현 경기도 여주군 금사면 도곡리) 양반 집안 출신이다. 일찍부터 천주교 신앙에 관심을 갖고 있던 그는 조선 후기 성호학파 거두로 권일신(프란치스코 하비에르, 1751~92)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함으로써 천주교 공동체 일원이 됐다. 1801년에 순교한 윤운혜는 그의 부인이고, 정순매는 여동생이다.

 입교 이후 정광수의 삶은 누구보다 열심한 신앙생활로 요약된다. 그러다가 경기도 양근 한감개(현 경기도 양평군 강상면 대석리)에 살던 윤운혜와 혼인했는데, 천주교 신자가 아닌 정광수의 부모가 결혼을 반대했기에 혼인문서를 주고받지는 못했다. 당연히 집안에서도 교리의 가르침을 지킬 수도 없었다.

 그러던 중 1794년 말 주문모 신부가 입국하자 그는 한양에 올라가 주 신부에게 성사를 받고 교리를 배웠다. 그 뒤 주 신부 지시에 따라 김건순(요사팟)에게 편지를 전하고 고향 인근에서 교리를 전하며 선교에 헌신했다.

 그러나 그의 부모는 여전히 천주교 신앙을 버리고 제사에 참여할 것을 강요했다. 정광수는 1799년 부인과 함께 여주를 떠나 한양 벽동(현 서울 종로구 송현동)으로 이주한 뒤 자신의 집 한 편에 집회소를 만들고 주 신부를 모셔다 미사를 봉헌하는 한편 교우들의 모임 장소로도 제공했다. 이 때 정광수의 집에 자주 모이던 교우들이 홍필주(필립보)와 김계완(시몬), 홍익만(안토니오), 강완숙(골룸바), 정복혜(칸디다) 등이었다.

 양반이었기에 이미 상당한 학식을 지니고 있던 정광수는 천주교 공동체 내에서 교회서적을 베껴 신자들에게 배포하는 일을 맡았다. 아울러 부인 윤운혜와 함께 예수님, 성모님 상본이나 묵주를 제작해 신자들에게 판매하거나 나눠줬다. 가까운 교우들과는 자주 만나 함께 교리를 연구하거나 기도 모임을 갖곤 했다. 자식에게도 일찍부터 교리를 가르쳐 신앙의 길로 인도했다.

 그 행복했던 나날의 평화는 길지 않았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면서 부인 윤운혜의 언니 윤점혜(아가타, ?~1801)가 체포되자 그는 자신도 머지않아 체포될 것이라고 생각하고 몸을 피했다. 이미 박해 초기부터 그는 천주교 공동체 우두머리로 지목돼 있었기 때문이다.

 예상대로 그해 2월 자신의 집을 급습한 포졸들에게 부인 윤운혜가 체포돼 포도청과 형조에서 배교를 강요당하며 문초를 받은 뒤 그해 5월 14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당시 한양과 지방을 오가며 이리저리 피신을 하던 정광수는 더 이상 피신을 단념하고 스스로 포졸들 앞에 나아가 천주교 신자임을 고백하고 체포된다. 그 때가 1801년 9월이었다.

 한양 포도청에 압송된 정광수는 여러 차례 배교를 강요당하며 형벌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에 굴하지 않았다. 신자들을 밀고하라는 명령도 거부했다. 이처럼 꿋꿋이 수형생활을 하던 그는 형조로 이송돼 사형판결을 받는다. 이어 고향 여주로 끌려가 1802년 1월 29일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정광수가 형조에서 마지막으로 진술한 내용은 「사학징의(邪學懲義)」를 통해 전해온다.

 "저는 양반의 후손으로 나라의 금령을 무시하고 천주교 신앙에 깊이 빠졌습니다. 천주교 신자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주문모 신부를 아버지처럼 생각했습니다.… 또한 천주교 성물을 만들어 곳곳에 배포했고, 교우들과 함께 천주교 신앙을 전파하는 데 노력했으니 그 죄는 만 번 죽어 아쉽지 않습니다."



 
▲ 탁희성 화백 작 순교자 시리즈 제35



가톨릭평화신문  2013-0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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