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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문화산책]<7> 성음악(2) 성음악의 생성과 분화 그리고 통일

지역 따라 발전한 성가 통일로 교회음악 체계 세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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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령을 상징화한 비둘기가 불러주는 성가를 듣고난 그레고리오 1세가 이를 필사자에게 불러주며 석판에 쓰도록 하고 있다.
 


 
▲ 독일 뮌스터 가르멜수도원 오르가니스트 마이클 깁슨이 그레고리오 성가대에 앞서 트리덴티노 미사 전례에 맞춰 선창하고 있다.
교황 베네딕토 16세는 지난 2007년 7월 트리덴티노 방식의 미사를 허용하는 자의교서 「교황들」을 발표한 바 있다.
 
 
현대는 교통과 통신 수단의 발달로 전 세계가 일일생활권에 들었다. 아니 지구의 이쪽저쪽이 첨단장비 덕분에 동시에 함께할 수도 있다. 극단적인 통일 시대다. 언어조차도 영어로 전 세계가 서로 통한다. 그럼에도 여러 민족은 자기 고유 언어를 보존하기를 고집한다. 통일이 좋을까, 아니면 고유 문화를 기반으로 한 분화가 좋을까? 영원히 끝나지 않을 논제다.

 전례에서도 이 문제는 중요하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 밀라노 칙령에 따라 그리스도교 박해가 끝나고 교회는 외형적으로 눈부시게 성장했다. 단순했던 최후 만찬 기념 예식은 황제 예식에서 많은 요소들을 도입, 성대한 전례로 발전했다. 그러나 전례의 최소한 본질적 부분을 제외한 장식적 부분들은 각 지방에 따라 서로 다르게 발전했다. 한반도처럼 작은 땅덩어리에서도 산하 때문에 전라도와 경상도, 경기도, 평안도, 함경도 등지에서 특색 있는 방언이 생겨난 것을 이해한다면, 각기 다른 민족으로 구성된 유럽의 넓은 땅덩어리에서 여러 개성적 전례가 발전했다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특히 로마 제국의 동ㆍ서로마 분리는 동방과 서방교회 전례라는 큰 두 줄기를 만들었다. 동방 전례는 다시 지방에 따라 여러 가지로 분화됐다. 서방 전례도 로마 전례와 프랑스 갈리아 전례, 스페인 모자라빅 전례,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도 밀라노를 중심으로 한 암브로시오 전례와 남부 이탈리아의 베네벤토 전례로 분화 발전했다. 이같은 지방 전례는 미사 기도문도 따로따로 갖고 있었고, 미사 기도문을 노랫말로 하는 성가 또한 서로 다를 수밖에 없었다. 말하자면 다양하게 분화하는 시대였다.

 이 시대 음악 형태는 통칭 평성가(라틴어 Cantus Planus, 영어 Plain Chant)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음역이 한 옥타브 안팎이고, 리듬도 단조롭기에 `평평하다`고 해 붙인 이름이다. 라틴 전례에 속하는 각 지방 전례 평성가들이 통일되는 획기적인 때가 있었으니, 그 유명한 그레고리오 대교황(Gregorius Magnus, 540~604) 때였다.

 로마 귀족 가문에서 태어나 관리가 되고 로마 행정장관을 거친 그레고리오는 성직자가 됐고 교황 특사로 동로마제국에 파견되기도 했다. 590년에 제64대 교황직에 오른 그는 행정가로서 경험을 교회행정에도 접목시켜 교회 제반 제도를 확립했다. 그의 탁월한 정치외교술로 로마 황제 권위보다 교황 권위가 더 강하게 됐다. 그는 교황이자 음악가이고, 또한 저술가로서 많은 업적을 남겨 역사에서 레오 대교황과 더불어 대교황이라는 칭호를 듣는 두 분에 든다.

 중앙 권위가 초월적이 되면 당연히 따르는 결과는 통일 시도다. 그레고리오 대교황은 로마교회 전례가 모든 서방교회 표준 전례가 되도록 했고, 이에 따라 로마 성가는 모든 서방교회 표준 성가가 됐다. 이후 상위개념인 평성가라는 용어는 약해지고, 로마 성가에 대교황의 이름을 붙인 그레고리오 성가(라 Cantus Gregorianus, 영 Gregorian Chant)라는 용어가 더 일반화됐다.

 그렇다면 이 시대 성가는 어떻게 전수됐을까? 이 시대에는 소리예술인 음악을 기록하는 수단, 즉 악보라고 부르는 기보법(記譜法)이 없었다. 혹자는 기호악보가 있었다고 추측하기도 하지만 근거는 없다. 단 한 개 수사본(手寫本)조차도 증거물로 발견되지 않았다. 그리스의 문자악보 이후 최초 기보법으로 꼽히는 기호악보는 9세기 중반에 가서야 비로소 세상에 나타난다. 이러니 이 시대에는 입에서 입으로 외워서 노래하고 전수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성가집이라면 오직 가사만이 적혀있을 뿐이다.

 성가 통일 노력은 그와 후대 교황들에 의해 지방 선교의 중요 수단이 됐다. 문화가 미약한 시절에 노래는 큰 파급력을 지녔기 때문이다. 대교황은 베네딕도회 아우구스티노 수사를 선교사들과 함께 영국에 보내 먼저 성당과 수도원, 성가학교를 세우도록 했다. 교황 바오로 1세(재위 757~767) 역시 프랑스 선교를 위해 성가집을 만들고 성가 전문가들을 파견, 성가학교를 건립했다. 이때 신성로마제국이 건국되면서 초대 황제인 카알 대제(샤를르 마뉴, 742~814)는 대제국을 유지하는 데 전례와 성가를 유효적절하게 사용했다.

 독일 선교 초기에도 역시 그레고리오 성가는 큰 몫을 했다. 성 보니파시오는 첫 선교사로서 역시 성가학교를 세웠다. 이 결과로 10~12세기에는 전 유럽에 그레고리오 성가 전성시대가 펼쳐졌고, 이같은 분위기는 결국 서양음악사에서 서방교회 음악이 주류가 되는 원인이 됐다. 여기에 반해 동방교회 음악은 미약했고, 음악사에서도 부차적 역할만 맡았다.

 강력한 지도력에 따른 통일은 큰 결실을 얻지만, 지방 문화를 다 없앨 수는 없었다. 또 그것이 바람직한 것만도 아니었다. 그래서 지금도 밀라노를 중심으로 암브로시오 전례와 성가가 사용되고 있고, 스페인 톨레도를 중심으로 몇몇 지방에서는 모자라빅 전례와 성가가 남아 있다.

 훨씬 후대인 13세기에는 영국 살리스버리에서 사룸(Sarum) 전례가 새로 형성돼 프랑스에도 영향을 미쳤고, 여기서 다시 로마 전례에도 영향을 줬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 전례개혁에 의해 위령미사 연경으로 시편 42장을 도입한 것이나, 화답송이 시편 23장으로 바뀐 것이 그 대표적 예다. 독일어권에서는 로마의 엄격



가톨릭평화신문  201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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