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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 125위] <28> 김진후 비오ㆍ종한 안드레아 부자

대를 이은 빛나는 순교 가문 김대건 신부에서 꽃 피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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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 선조 김진후와 김종한 부자, 김대건 신부 등이 대를 이어 살았던 신앙의 터전 솔뫼성지에 2004년 복원한 생가.
1998년 7월 충청남도 기념물 제146호로 지정된 김대건 신부 생가터 1587.60㎡(450평) 대지에 정부 지원금 4억 2000여만 원을 들여 세워졌다.
생가는 전통 한옥 구조로, 당시 내포 양반층이 살던 집 형태를 근거로 건립했다.
최근엔 생가 일부를 성체조배실로 꾸며 순례자들이 성체신심을 다지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평화신문 자료사진
 
 
 믿음은 대를 잇고 복음의 씨앗은 세상에 퍼져나간다. 김진후(족보명 운조, 비오, 1739~1814), 아들 김종한(일명 한현, 안드레아, ?~1816), 손녀 성 김 데레사(1779~1840), 손자뻘인 첫 한국인 사제 성 김대건(안드레아, 1821~46) 신부…. 훗날 믿음의 뿌리가 된 내포평야 한 가운데에 자리한 충청도 면천 솔뫼(현 충남 당진시 우강면 송산리)를 터전으로 살아온 김해김씨 일가는 숱한 순교자를 냈고, 빛나는 영광의 가문이 된다. 그들 순교자 생가는 이제 솔뫼성지로 복원돼 내포교회(대전교구)에서 신앙의 모범이 됐다.

   김대건 신부에서 꽃을 피운 솔뫼 김해김씨 집안의 첫 신앙인은 그러나 김진후가 아니라 그의 맏아들 종현이다. 김대건 신부의 아버지인 김제준(이냐시오)이 훗날 진술한 바에 따르면, 그의 집안에서 천주교 신앙을 처음으로 받아들인 사람은 `내포의 사도`라고 불린 이존창(루도비코 곤자가)에게서 교리를 배운 `종현`이었다.(「일성록」 기해 8월7일 ; 「추안급국안」 기해 8월 13일) 그로부터 김대건 신부의 할아버지인 둘째 택현, 셋째 종한 등 가족들이 교리를 배워 입교했다.



 
▲ 탁희성 작 제111도 `김진후 비오의 옥중신공`.
김대건 신부의 증조부인 그는 10년간이나 옥고를 치르면서도 기쁨 속에서 기도로 옥중생활을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진다.
 
 
 #지천명의 나이에 신앙 받아들여
 그렇지만 김진후는 입교를 거부하다가 자식들의 계속된 권유에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고, 훗날에는 아주 열심한 신자가 됐다.

 이후 박해 때마다 솔뫼 김씨 집안은 모진 시련을 겪어야 했다. 특히 김진후는 체포와 석방, 형벌, 유배를 번갈아 당하다가 1814년에 옥사로 순교한다. 그럼에도 집안의 신앙은 오히려 굳건해졌고, 언제든 시련을 이겨낼 덕행을 갖춘다.

 물론 김진후가 처음부터 신앙에 열심이었던 건 아니다. 오히려 평소 미신 행위와 풍수지리에 몰두했다. 은총의 길에는 마음을 닫고 오직 세상 영예만을 갈망했다. 지방 군수 곁에서 작은 관직도 얻었다. 가톨릭 신앙에 귀의할 것을 권하는 아들 종현의 간청도 계속 뿌리쳤다. 그러나 결국은 모든 영예를 버리고 천주교에 입교해 열심한 신앙생활을 한다. `하느님 은총`이라는 말로밖에는 설명할 길이 없다.

 1791년 신해박해 당시 관아에 불려나가 신앙을 고백한 이후 그는 풀려났다가 잡혀가기를 거듭했다. 끌려간 곳도 한두 곳이 아니다. 홍주(현 홍성)와 청주, 공주 관아에 끌려가 신문과 형벌을 감내해야 했다. 1801년 신유박해 당시엔 체포돼 유배를 갔는데, 그 와중에 한 번 배교해 목숨을 보존했던 듯하다.

 유배에서 돌아왔지만 1805년 다시 체포돼 해미 진영으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야 했다. 그가 천주교 신자로서 신자답게 행동한 것은 이때부터로 알려져 있다. 관장 앞에서도 서슴없이 신앙을 고백하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당시 박해는 공식 박해가 아니었기에 사형선고를 받지 못한 채 재판이 무한정 길어졌고, 기약없는 기다림 속에서 그는 옥중에 갇혀 지내야 했다. 그 고통이 얼마나 컸을지, 짐작조차 어렵다.

 그렇지만 그는 신중한 성품과 품위 넘치는 처신으로 주위 사람들, 특히 해미 아전이나 옥리들에게서 존중을 받았으며, 드러내놓고 신앙을 실천하고 신앙의 본분을 지켰다. 그렇게 1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모범적이면서도 끝없이 인내하는 옥중생활 끝에 그는 1814년 12월 1일 해미읍성 감옥에서 세상을 떠난다. 향년 76살이었다. 아무리 신앙에 따른 인내가 강하다고 할지라도 그 참혹하고 고통스러운 옥살이를 견딜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다.

 그가 숨을 거둔 이유가 지병 때문이었는지, 굶주림 때문이었는지, 혹독한 심문과 매질 때문이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러나 그가 생전에 당한 고난과 옥중에서의 신앙과 삶으로 온 교회가 그를 기리게 된 것만은 분명하다. 또 그의 신앙고백으로 그의 후손들 가운데 1846년 병오박해 순교자인 김대건 신부를 비롯한 여러 순교자가 나왔다.

 




가톨릭평화신문  2013-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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