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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종]-<29> 홍낙민 루카ㆍ재영 프로타시오 부자

신유ㆍ기해ㆍ병인박해로 이어지는 3대 순교자 모두 시복 대상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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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탁희성 작 제21도 `홍낙민 루카 형장으로 끌려감`.
 
   3대에 걸친 순교자 배출의 영예는 시대를 초월한 삶의 고백이었다.

 통회와 정개(定改)를 통해 진정한 믿음의 길로 들어서고, 예언자적 부르심에 투신하며, 사랑과 애덕 실천으로 나아간 삶이었다. 이로써 순교는 `죽는 이유를 증거하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를 찾는 믿음과 희망, 애덕의 순간이 됐다.

 홍낙민(루카, 1751~1801)에서 비롯돼 홍재영(프로타시오, 1780~1840), 홍봉주(토마스, 1814~1866)로 이어지는 풍산 홍씨 3대 순교 또한 66년간에 걸친 과거에 대한 통회와 현재에 대한 고백, 미래에 대한 보속을 통해 신앙을 증거한 삶에 다름이 아니었다.

 홍낙민ㆍ홍재영 부자는 이미 하느님의 종 윤지충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123위에 포함된 바 있고, 홍봉주 또한 최근 주교회의 봄 정기총회를 통해 2차 시복시성 대상자인 `이벽 요한 세례자와 동료 132위`에 포함됨으로써 1801년 신유박해와 1839년 기해박해, 1866년 병인박해로 이어지는 3대 순교자들이 모두 시복 대상자에 포함되는 영광을 안았다.

 이들의 삶 속으로 들어가보면, 순교영성이란 주님을 따르며 복음을 전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왕국을 선포하는 교회의 선교사명(mission)과 동떨어진 게 아니라는 사실을 체감할 수 있다. 순교자들의 삶과 수난, 죽음에 의해 이뤄진 신앙 증언(Marturia)은 그리스도께 대한 매우 독특한 모방(Imitatio Jesu Christi)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Sequela Jesu Christi)이며, 나아가 그리스도 신앙(Christianisme) 안에 사는 것이었다.

 홍낙민 결안(結案), 곧 사형선고 최종 판결문을 보면 그의 삶과 신앙, 행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국청에서 아뢰기를, `천주교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어찌 감히 예수를 욕하겠는가`하면서 제멋대로 공술하니, 그 흉악함이 최창현ㆍ최필공과 하나이며 둘이고, 둘이며 하나입니다. 만일 이를 사형으로 다스린다면 여러 죄수 가운데 복법(伏法, 사형을 받아 죽음을 당함)된 자들이 같은 죄로 다른 형벌을 받게 되는 것을 면할 수 없으니, 청컨대 홍낙민은 요사한 글과 말을 전해 여러 사람을 미혹시켰다는 다짐을 받고 격식을 갖춰 (사형을) 거행하소서, 했더니 `아뢴 대로 하라` 했다."

 충청도 예산 양반집안 출신인 홍낙민은 1751년생으로, 훗날 충주에 이주해 살던 중 1780년 생원시에 합격했고, 1788년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한양으로 이주해 살면서 관리들 탄핵기관인 사헌부 지평(정5품)과 문관 인사를 맡은 이조 정랑(정5품) 등을 지냈다.

 그런데 그가 세례를 받은 것은 관직을 받기 4년 전인 1784년의 일이다. 1776년 경기도 양근의 유명한 학자였던 권철신(암브로시오)의 제자가 된 것이 계기였다. 그때부터 이미 그는 조선교회 지도층이었다. 한때의 일이었지만 가성직제도 아래서 다른 신자들에게 성사를 집전하기도 했다. 이는 당시 신자들이 성직자가 부재한 상황에서 교회법과 교리를 알지 못하는 상황에서 벌어진 해프닝이었다.

 1791년 신해박해가 일어나면서 그는 정조의 명에 따라 신앙을 멀리한다. 하지만 이는 겉으로 드러난 모습일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뒤엔 기도생활을 꾸준히 지속했고, 교리에 따라 금식재(jejunium, 대재)와 금육재(abstinentia, 소재)와 같은 절제와 극기의 재(齋)를 지켰다. 수난과 죽음, 부활로 이어지는 그리오도의 사랑을 묵상하며 절제와 극기를 통해 사랑을 실천했다. 1791년 말 주문모 신부가 조선에 입국한 이듬해 그는 성사를 받을 준비를 했다.

 그러나 1795년 주 신부를 체포하기 위한 을묘박해가 일어나면서 체포되자 두려운 나머지 그는 천주교를 배척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같은 그의 행동은 하지만 일시적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그는 다시 교리를 실천하기 시작했다. 1799년 모친상을 당하자 교회 가르침에 따라 신주(神主)도 모시지 않았다. 다만 겉으로는 천주교를 멀리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함에도 순교의 날은 다가왔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나 동료들과 체포돼 의금부로 끌려가 문초를 받게 된 그는 처음엔 두려운 나머지 나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러다가 그는 점차 이전에 보이지 않았던 용덕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리고 재판관들 앞에서 마지막으로 이렇게 답변한다.

 "내가 과거에 행하고 말한 모든 것은 일시적으로 목숨을 부지하기 위한 수치스런 은폐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유배형에 처해진 지금 마음에 있는 모든 것을 당신에게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으로 인해 주저 없이 죽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 나는 하느님을 위해 죽기를 원합니다."

 이처럼 굳게 신앙을 증거한 그는 마침내 사형판결을 받고 1801년 4월 8일 한양 서소문 밖으로 끌려나가 참수형을 받고 순교한다. 그의 나이 50살이었다.

 

 어려서 부친에게 교리를 배운 홍재영은 장성한 뒤 동료들과 함께 신앙공동체를 만들어 함께 교리를 연구하고 교회활동에 참여한다. 황사영(알렉시오)이 그의 동서다. 그러나 1801년 박해 당시 체포된 그는 신앙을 지키지 못하고 전라도 광주에 유배된다.

 유배지에서의 삶은 신산스러웠다. 그러기에 한동안 냉담을 거두지 못했다. 그러던 중 그는 어느 날 다시 신앙을 되찾는다. 하느님의 은총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이전 잘못을 보속하려는 의지로 더욱 열심히 교리를 실천했다. 주님 가르침에 따라 자녀들을 교육하고 기도와 묵상생활에도 열중했다. 어떤 때는 너무나 오랫동안 꿇어앉아 기도한 탓에 걷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일주일에 세 차례나 대재(금식재)를 지켰고, 어려운 교우들을 위해 자선을 베풀었다.

 1832년 조정에서 대대적 사면령을 내리자 광주 관장은 그를 불러 "이제 마음을 고쳐 먹고 고향으로 돌아갈 것"을 설득했지만 그는 유혹을 물리치고 이후에도 광주에서 살며 신앙에만 전념했다.

 이로부터 7년 뒤인 1839년에 기해박해가 일어나자 그의 내면엔 순교의 열망으로 가득찼다. 이전에 잃은 순교 기회를 다시 찾겠다는 열심이었다. 이에 그는 피신한 교우들에게 자신의 집을 내어주고 한 가족처럼 보살폈으며, 갈 곳이 없는 여교우 네 명도 돌봤다. 그러던 중 전주에서 파견된 포졸들이 그의 집을 급습, 김조이(아나스타시아)와 이봉금(아나스타시아), 이조이(막달레나), 최조이(바르바라) 등을 체포하면서 그도 붙잡혔다. 당시 그가 체포되자 읍내 주민들은 300여 명이 한꺼번에 몰려나와 "어떻게 이처럼 의로운 사람을 왜 벌한단 말인가"하고 말하며 울부짖기까지 했다.

 광주 관아를 거쳐 전주로 이송된 그는 거듭 문초와 형벌을 받아야 했다.



가톨릭평화신문  2013-0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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